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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C Press Feb 25. 2021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장소에서 공간으로

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임한솔 / hsollim@hanmail.net


서명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 : the perspective of experience)

저자 이푸 투안(Yi-Fu Tuan)

역자 구동회, 심승희

출판사 도서출판 대윤

출판일 1995년 8월 28일

ISBN 89-86169-02-9 93300



지도로 지리를 익히는 필자와 달리, 필자의 아내는 길 위에서 지리를 익힌다. 아내는 동서남북의 방위나 안쪽, 바깥쪽 등의 상대 위치보다는 그곳에서 무엇이 보이는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한번 지나간 길은 잃어버렸던 적이 없다.


이푸 투안에 따르면 필자는 공간의 인식, 혹은 습득에 있어서 기술과 지식에 의존하는 편이고 아내는 감각을 사용하는 편이다. 두 성향 사이에 상대적 우위는 없다. 새로운 곳에 갔을 때는 사전에 알아간 내용이나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공간정보를 이용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보았던 곳을 갈 때에는 상황이 다르다. 익숙지 않은 장소를 잘 기억하지 못해 지도를 꺼내는 필자와 달리 아내는 거의 틀림없이 간판이나 길을 즉시 기억해낸다. 장소를 기억 못한 필자 자신을 떠올리자 이푸 투안이 비판한 ‘계획가’가 된 기분이었다. 공간보다 장소를 애호한다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경험을 탈피한 채 재현된 장소, 즉 지식으로서의 공간을 선호한지 오래였음을 깨닫고 말았다. 


이 책이 다루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 사이에는 경험(experience)이 있다. 책의 표제인 「공간과 장소」가 이 책이 다루는 주요 대상이라 한다면, 한역되지 않은 부제인 “the perspective of experience”라는 구절은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은 공간보다 장소에 방점을 두고 쓰였다. 이를테면 “공간→(경험)→장소”의 도식으로 책의 시선을 간략히 말할 수도 있겠다. 이푸 투안이 제시한 통찰을 특정 사조나 시류에 묶고자 하는 언급은 아니나, 1972년에 세인트루이스의 공동주택인 프륏 이고(Pruit Igoe)가 무너지는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고, 1977년에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가 「The Language of Post-Modern Architecture」를 발표하였다. 이와 동일한 해에 「공간과 장소」가 발행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 생각된다. 이른바 모더니즘 건축으로 일컬어지는 ‘공간의 신화’가 무너지는 흐름과 이 책의 통찰이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장소의 개념과 중요성은 발행으로부터 40년이 흐른 오늘날 이미 너른 공감대를 얻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각을 단순히 되새김질 하는 것은 생각을 나아가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푸 투안이 「공간과 장소」에서 언급한 내용들 중 생각에 잠겼던 몇 가지를 재고해보고, 장소 개념이 공간의 계획과 어떠한 연관을 맺는지에 대한 단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공간과 장소의 관계


책을 읽으며 장소에 대한 이해는 분명 넓고 깊어졌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공간과 장소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쾌하지 않은 지점이 있었다. 공간과 장소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공간이며 장소인 곳은 없는 것인가, 공간이 아닌 장소 혹은 장소가 아닌 공간은 없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공간이 우리에게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P. 124)

간명한 문장이지만, 이 문장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공간과 장소의 문제를 상당 부분 함축한다. 위 문장에 따르면 공간이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와 ‘익숙한 느낌’이 필요하다. 장소의 존재는 주체의 지속적 체험이 전제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공간이 장소가 되는 동시에, 그 장소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박탈당하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공간은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볼 여지가 생긴다. 공간은 비어있는 순수한 물리적 형태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고, 아직 장소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곳-‘장소의 가능태’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많은 경우 전자의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경우 공간은 대부분의 장소를 포함한다고 여겨지며, 기억 속에 남아있으나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장소를 제외한다면 모든 장소는 공간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과 장소의 의미를 후자와 같이 상대적 범주로 나누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럴 경우 공간이 장소가 된 이후, 그곳은 더 이상 공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공간과 장소는 명백히 분리된 범주로 쓰일 수 있으며, 공간이 아닌 장소의 존재 또한 상정할 수 있다. 여기서 공간이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공간을 경험하여 장소화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장소가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장소화한 주체의 기억이 사라지면 된다. 실재하기 어려운 경우이겠지만, 그 공간을 경험했던 사람 모두가 그 공간을 몽땅 잊는다면 장소가 공간으로 환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소의 공간화 역시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공간과 장소는 서로 간의 의미 관계를 어떻게 상정하느냐에 따라 범주와 쓰임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에서 쓰이는 공간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경험과 무관한 물리적 환경’과 ‘장소의 가능태’ 두 가지를 오간다. 독해에서 공간의 의미에 대해 주의를 요하는 바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 책에서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장소를 염두에 둔 공간의 탐구 필요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의 성질에 대하여


공간의 물리적 성질 못지않게 장소로서의 인문적 성질 또한 중요하다는 것은 쉽게 동의가 된다. 그런데 그가 성찰을 촉구하는 계획가와 사회과학도의 입장에서 돌이켜보자면, 과연 무엇이 장소이고 어떻게 장소가 이루어지는지가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여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구하는 것은 가능한가? 


저자에 따르면 장소는 경험에 의해 성립되고, 때문에 기억·시간과 밀접하다. 그는 경험에 의한 장소의 성립과 관련된 많은 사례를 제시하였지만, 일반론을 언급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환경과 감정의 관계는 명확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기란 어렵다.”라고 하였으며 그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감정이 상대적인 경험-경험의 대조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문화와 경험이 환경의 해석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pp. 96~97). 가령 미국인들에게 서부의 열린 평원은 기회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러시아 농부들에게 끝없는 공간은 절망을 함축한다.


필자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다른 것으로 읽히지 않았다. 문화와 경험은 환경과 괴리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상보관계에 있다. 환경에 대한 이미지가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무의식적인 비교와 대조가 수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책에 수록된 수많은 사례들이 각각의 경우로서만 산재하며 장소의 중요성만 강화하기보다는 그것들 사이의 연계와 보편성의 발굴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의 40년 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가지 더, 책의 후반부에 이푸 투안은 장소가 정적이며, 영속성이라는 개념이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pp. 224~225).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장소에 대한 느낌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의 ‘질과 강도’라고도 언급하였다. 이 두 가지 언급은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두 언급이 양립하는 방법도 있다. 경험의 질을 우선 가치로 두되, 오랜 시간은 경험의 질을 담보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속성’을 장소의 주요 가치로 제시한 부분에서 이러한 이해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된다. 정적인 것과 영속성이 연관된 개념이라면, 짧지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경험은 영속성의 담보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 사회에 있어 인간의 생활공간이 이전 시기에 비해 분화되고, 이동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장소의 형성에 있어 ‘정적’이라는 관념은 점차 약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저자 역시 “장소감은 개별적인 장소를 넘어 이들 장소에 의해 정의된 지역으로 확장된다”(p. 292)라고 언급하였다. 언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단위로 확장된 장소 형성은 직접적 감각 위주의 장소 형성과는 궤를 달리하는 차원으로 이해된다. 더군다나 글을 읽는 시점인 현재의 도시환경은 당시보다 모빌리티, 노마드 개념을 통해 설명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장소에 성질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통찰이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까 한다.



공간-장소의 인식 방법 : 감각과 도구의 문제


이상이 「공간과 장소」가 다루는 주요 개념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다음으로 공간과 장소의 인식과 관련되어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감각과 도구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이푸 투안은 책의 전반부에서 감각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장소의 형성에 있어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해 서술하였다. 감각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예를 들며 서술하는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시각 외의 감각이 장소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청각과 촉각, 후각, 미각은 제각기의 방법으로 공간-장소의 인식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는데, 특히 촉각의 경우 시각과 연계하여 주목할 부분이 많았다. 시각이 판단 위주의 감각이라면 촉각이야말로 체험 위주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공간의 이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습득 요소 중 하나가 ‘가 보았는지’의 여부이다. 가는 것, 머무르는 것, 걷는 것 자체는 몸이 공간과 접해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촉각을 기반으로 수행된다고 할 수 있다. 촉각은 공간의 체험 여부와 직결되는 감각인 동시에, 시각과 연계되어 거리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감각이므로 공간감의 습득에서 핵심적이다. 인간이 공간의 크기를 가늠하는 방법은 걸음이나 신체 일부의 길이를 통해 유추하는 방식이 기본이다. 이러한 감각은 몸을 통해 직접 부딪쳤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체험을 통해 인식되는 공간감의 습득은 공간을 장소로서 인식하게 하는 것과도 밀접하다. 골목의 공간감과 광장의 공간감, 방의 공간감과 마당의 공간감은 확연히 다르다. 촉각과 연관되는 공간의 크기 인식은 공간을 기억하고 장소로 인식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소화와 관련된 감각의 기능 측면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 돋보이는 교통이나 매체의 개발은 감각의 기능을 축소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언명하며 매체를 통한 감각의 확장을 언급한 바 있지만, 이푸 투안은 장소의 인식 측면에서 그러한 관점과 상충되는 의견을 표한다. 이를테면 속도는 인간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주지만, 그로 인하여 인간은 광활한 느낌을 잃어버린다(p. 93). 인간은 도구의 발명으로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없던 것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일상적인 경험의 층위는 이전보다 성글게 되었다. 이는 지도 위주로 공간을 탐색하다가 눈앞의 경관을 기억하지 못했던 필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지역 단위로 장소의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저자의 말과 함께, 장소감에 있어 감각의 역할 또한 재고해볼 부분이다.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장소에서 공간으로


이푸 투안은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본주의적 기획과 더불어 “인식의 짐을 늘리는 것”임을 밝혔다. 지리학자와 계획가들이 간과하는 장소의 특질들을 드러내고 이를 무시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인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책이 중요히 읽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목적 이상을 달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남긴 인식의 짐은 상당한 양인데, 필자가 느끼기에 그 중 가장 무거운 짐 중 하나는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장소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에 따르면 건축 등의 공간 디자인은 자연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건축과 도시는 인간이 자연의 기하학적 패턴, 느낌, 사유 등을 형태로 구체화한 결과이며(p. 36), 너무나 강렬하고 모순적이어서 인간의 정신과 감각에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자연을 경험할 수 있게 하고(p. 183), 인간의 공간인식 범위를 확장시킨다(p. 189). 이러한 점에서 공간 디자인은 합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자인 행위는 그 자체로서 문화적 맥락을 만들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다만 계획가는 곧장 장소를 설계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도면을 통해 공간을 그릴 수는 있지만, 장소를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획가의 입장에서 공간을 설계할 때는 미래의 장소에 대한 충분한 생각이 담겨야 한다. 슬럼화된 프륏 이고나, 텅 빈 채 헐리기를 기다리는 박람회장의 건축관들을 다시금 불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획은 어떠한 방식의 사유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까. 이 책의 주 개념을 빌자면, 그것은 설계의 제반 조건인 공간에서 시작하여 장소에 대한 상상으로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장소의 상상을 가능성으로 치환한 채로 공간으로 돌아와 설계를 마쳐야 할 것이다. 장소를 품은 공간의 상태로 구현이 될 때에야, 한 걸음씩의 경험이 담겨 장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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