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이렇게 길 줄 모르고,
젊을 때 너무 조급하게 살았던 게 후회돼요.
조금 여유 있게 살아도 돼요.
여든이 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많아요.
- 이시형 -
“아직도 일해요?”
“그 나이에 힘들게 왜요?”
“이젠 좀 쉬셔야죠.”
노인을 위하는 듯한 말이지만, 그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말입니다. 말 자체는 무례하지 않지만, 그 속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노인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존재, 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믿음.
그러나 내가 만난 노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삶을 다듬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일, 생산적 활동’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었습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어떤 이는 여전히 일했고, 어떤 이는 창조하며, 또 다른 이는 사회와의 연결을 갈망했습니다. 취미를 이어가고, SNS로 관계를 맺으며, 가족을 돌보고 식사 준비하고,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낍니다. 그 일상은 노년의 시간을 의미 있게 빚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는 몇 해 전, 이탈리아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¹³ 조각 앞에 섰을 때, 오랫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임종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미완의 작품.
다듬다 멈춘 흔적, 남겨진 여백.
깎아낸 자국마다 생의 흔적이 배어 있고,
남은 여백마다 관람자의 이야기가 스며듭니다.
끝내 완성하지 못했기에,
끝없이 새로 읽히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아직 미완이다
(Weil wir leben, sind wir noch unvollendet).”
철학자 가다머(H. G. Gadamer, 1960)가 말한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해석하고, 다시 쓰고, 덧붙이며 존재를 이해합니다.
‘미완’은 멈춤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새롭게 읽히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론다니니 피에타처럼 다듬다 멈춘 결을 품고 있지만,
그 자국은 여전히 창의적입니다.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열어 줍니다.
깎여 나간 상처와 남겨진 흔적,
견뎌낸 고통과 회한,
그리고 다시 피어난 용서와 통합이 어우러진 여정.
그 안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자기 초월의 빛이 살아 있습니다.
하이데거(Heidegger, 1927)는 “인간 존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Das Dasein ist Sein zum Tode).”라 했습니다.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실존적 경계로 이해했습니다. 죽음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삶을 더 진지하고, 더 참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이 삶을 끝내는 ‘종결’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진하게 살게 해주는 깨달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죽음을 ‘선취’하는 순간 비로소 자기 삶의 본래 의미와 마주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오히려 삶을 가장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 거울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때, 하루의 숨결조차 감사로 채워지고, 몸의 고통조차 ‘아직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이미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든 몸을 끌고도, 잃어버린 기능 속에서도, 여전히 삶의 무대 위에서 춤을 춥니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은 자신을 다듬고, 세월을 빚으며, 마침내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리듬이 됨을 보여줍니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여전히 삶을 창조하는 인간의 존엄이며,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존재’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남은 시간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고,
타인과 마음을 나누며,
삶의 의미를 다시 빚어가는 창의적 과정입니다.
매일의 선택이 곧 자기만의 마지막 장을 다듬는 손길이 됩니다.
살아 있기에 미완이고, 미완이기에 여전히 가능성입니다.
이 책에 등장한 여섯 명의 여든 이후 삶을 함께 따라가며,
‘사람을 깊이 만난다’라는 의미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일생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마주하고, 옷깃이 여며지는 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바라본 그들, 그들이 바라본 자기 자신,
그리고 사회와 자녀들이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나는 그들 존재를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바라보았지만,
자녀들은 잃어버린 것, 상실의 흔적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바라본 노년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삶에 갖는 신뢰, 홀로서기의 자랑스러움,
온전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청자씨는 상실을 예술로 바꾸었고,
학산씨는 전통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철수씨는 봉사를 통해 세상에 닿았고,
용선씨는 춤으로 행복을 새로 썼습니다.
영미씨는 신앙을 통해 자신을 확장했고,
정자씨는 죽음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다움’을 지키며, 삶의 고통을 새로운 의미로 전환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거창한 버킷리스트는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며 이미 완성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자씨와 철수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산씨와 청자씨의 몸은 점차 약해지고 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과학의 잣대로만 해석하기엔 너무 인간적이고,
숫자의 논리로만 설명하기엔 너무 아름답습니다.
진단의 틀에 가두기에는 너무 애잔하고도 존엄합니다.
청자씨, 학산씨, 철수씨, 용선씨, 영미씨, 정자씨,
그들의 이름은 내 마음에 울림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여든 이후 삶의 마지막 장에서
그들은 여전히 다듬어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순간에도 다듬어지고 있는 당신 인생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울림이야말로
한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