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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Jan 28. 2023

도덕적 작가와 비도덕적 창작물

몇 가지의 사례들

영화보다 우선 된 것     


 이동진이 영화 <기생충>에 대해서 쓴 한 줄의 평은 이른바 ‘명징과 직조 사태’를 불러왔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급기야 이동진은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직접 출연해 본인의 한 줄 평에 대해 해설해야 했다. 하지만 ‘명징과 직조 사태’는, 개인적으론 이전에 이동진이 OTT 서비스 ‘왓챠’에 기입한 어떤 영화의 별점과 한 줄 평이 불러온 사태에 비하자면 그저 해프닝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동진은 조정래의 영화 <귀향>에 별점 2개를 부여하고, “역사에 대한 울분, 영화에 대한 한숨”이라고 한 줄 평을 작성했다. 그러자 즉각, 이동진의 한 줄 평에 대한 반응이 뒤따랐다. 요약하자면, ‘일본군 성노예를 다룬 영화에 이런 낮은 평가를 하는 것이 온당한가’였다. 이 반응에는 하나의 논쟁적 씨앗이 담겨있다. 즉 ‘영화’ 보다 앞서는 어떤 것.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소재, 태도와 의도가 영화 그 자체보다 우선하고 그것이 평가(정확하게는 ‘고평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 관점에서 보면 <귀향> 같은 경우에 영화는 윤리적인 ‘메시지’나 도덕적 ‘소재’, 시급하게 이야기할 ‘시대정신’을 운반하는 운송수단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이 ‘운송수단’의 완성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당 운송수단이 운반하는 ‘화물’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가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운송수단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극단적인 비유와 논리적 비약을 감수하고 계속 밀고나가 보자. 이를테면, 여타의 자동차보다 환경오염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전기차가 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해당 자동차는 낮은 연비, 잘못 조립된 부품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 낮은 강성의 필러 사용으로 인해 사고 시 운전자 보호에 취약하다. 그렇다면, 이 전기차는 ‘자동차’의 관점에서 과연 좋은 차인가? 이 전기차는 시급하고 절박한 참여가 필요한 ‘환경보호’의 측면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훌륭하지만, ‘자동차’라는 태생적 카테고리의 평가기준에선 좋은 차로 부르기 어렵다.      


 그러니 다시 <귀향>으로 되돌아가면 일본군 성노예라는 비극적 역사와, 해결되지 않은 동시대의 문제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명예를 환기한다는 측면에서 <귀향>은 일정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해냈다. 하지만 이것은 <귀향>이 지닌 어떤 ‘사회참여’적 성격에서의 기여와 성취로 보아야 한다. 여전히 영화라는 태생적 형식을 지닌 <귀향>은 ‘영화적 완성도’라는 평가기준 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간 그 무엇이 되어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당위성이 없다. 여기서 잠깐. <귀향>의 부족한 영화적 완성도를 지적한다고 해서 <귀향>이 다루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제도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혹은 해당 이슈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고 배척한다는 뜻이 아니다. <귀향>이 다룬 주제와 소재, 메시지 자체가 이 영화를 선택하는 주요한 이유가 된 관객들을 평가절하 해야한다는 뜻도, 그런 관객들이 극단적 민족주의자(국뽕)라는 뜻도 아니다. 침해받고 훼손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진실’. 바로 거기까지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영화’라는 외피이자 형식은 어떤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윤리적인가 아닌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최근 몇 년간 반복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주제’와 ‘메시지’, ‘소재’를 그것들을 둘러싼 형식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 그것이 영화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간에. 이보다 우선으로 취급하는 경우들이다. 이 현상들 속에서 가장 오용되는 단어는 ‘윤리’다. 이 영화는 윤리적인가 아닌가, 특정한 장면에서 재현된 이미지는 윤리적인가 아닌가, 이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태도가 윤리적인가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소재와 주제 자체가 윤리적인가 아닌가. 해당 작품의 온갖 요소들에 대해 ‘윤리적인가 아닌가’의 채점기준을 들이대고 어느 특정문항에서 탈락한 영화들은 영화라는 형식이 소거되고 단순한 이름표를 얻는다. 이를테면 여혐 영화, 남혐 영화.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쥬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임신중단을 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는 두 명의 여성 대학생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실컷 ‘영화보다 윤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노파심에 미리 적자면 이 영화는 임신중단 반대 영화가 아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1987년,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치하를 배경으로 한다. 당연히 이 시기의 루마니아에서 임신중단은 합법이 아니다. 임신중단이 합법이 아니란 의미는 곧 국가가 국민의 신체에 대해 일정수준 이상의 통제권을 지닌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대학생들은 불법으로 한 호텔방을 예약하고, 그곳으로 의사를 부른다. 호텔로 불려온 의사는 어려운 시술임을 강조하며 자신이 이 시술을 해내야 할 어떤 ‘메리트’를 요구하고, 결국 친구의 시술을 돕기 위해 함께 호텔에 온 주인공은 의사의 요구대로 성적인 의미에서 신체를 제공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한국에 개봉할 당시, 포스터의 문구는 “전세계를 뒤흔든 충격 영상!!”(느낌표가 진짜로 두 개다) 이었다. 거의 90년대 후반 비디오 가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쇼킹 아시아> 같은 영화에나 쓸 법한 문구가 찍혀있는 한국판 포스터를 보니 새삼 슬프다. 하여튼, 이 ‘충격영상!!’은 아마도 해당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임신중단 시술 이후 호텔방 화장실 바닥에 버려진 태아의 사체 이미지를 지칭할 것이다. 시술을 받은 친구는 사라져버리고, 주인공은 남자친구의 집으로 갔다가 다시 그 문제의 호텔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화장실 바닥에서 태아의 사체를 발견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매우 공들여 찍는다. 외화면에 있을 태아의 사체를 서서 바라보는 주인공을 아래에서 먼저 보여주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리액션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화면 바깥에 있는 태아의 사체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표정을 잡는다. 즉 보는 사람들이 태아의 사체가 직접 화면에 등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할 때 쯤 벼락같이 태아의 사체가 그대로 화면에 보인다.      


 최근 일련의 영화제 단편경쟁 작품들을 보면 언젠가부터 ‘보여주지 않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추상적 방법론(물론 해석론에서도)이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범죄실화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서 범죄 장면을 재현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사례들이 있다. 이를테면 토마스 맥카시의 <스포트라이트>는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을 밝혀낸 보스턴 글러브의 기자들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기자들은 성인이 된 아동성추행 피해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듣는다. 이 영화에서 피해자의 증언은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직접 배우들의 육성을 통해서 언급되는 경우는 최소화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충분히 그들이 겪은 범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지를 기자들의 리액션을 통해 묘사한다. 동시에 서사적으로 기자들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계속 난관에 부딪히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떨어져 나가도록 이야기를 설계한다.      


 따라서 스크린 바깥의 사람들은 범죄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은폐되었으며, 해결되지 못한 고통이 피해자들을 병들게 만들었는지 두 측면 모두를 실감할 수 있다. 리액션과 서사구조 만으로도 스크린 바깥의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했으므로 <스포트라이트>는 굳이 피해자들이 겪은 범죄 피해 사례를 이미지적으로 재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범죄장면을 찍지 않아서 ‘윤리적’인게 아니라 범죄장면을 재현하지 않고도, 왜곡없이 ‘명징’하게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범죄를 ‘직조’했기 때문에 윤리적인 영화다.    


 다시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되돌아 와서. 허수아비 치기의 위험성을 안고 추측해보자면, <4개월, 3주... 그리고 2일>속 사체 이미지가 지금 나왔다고 가정했을 때 ‘윤리적’으로 ‘재현하면 안 될’ 이미지를 재현했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이 일정부분 제기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태아의 사체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이 겪고 있는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주인공의 세계를 강력하게 소환해 내는 힘이 있다. 임신중단을 하기 위해 암거래를 해야 하고, 여성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1987년의 루마니아를 영화는 몇 개의 에피소드와 대화로 보여준다. 그나마도 직접적인 방식보다 은유적으로 주변부를 배회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영화는 주변부에서 시작해 더디지만 확실하게 ‘폭력’이라는 영화의 핵심으로 다가가고, 태아의 사체 이미지가 화면에 드러나는 순간 폭발적으로 핵심으로 도약한다. 이 이미지는 영화가 자신이 가진 형식. 긴장을 짜내는 서스펜스적 요소와 대구를 이루는 사회비판극으로서의 형식을 완성하고 동시에 보는 이들을 악몽의 순간으로 데려다놓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쓰였다. 비도덕적인 세계를 그리는 방식으로 크리스티안 문쥬는 ‘윤리적 재현’, ‘윤리적 이미지’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1987년 독재치하의 루마니아’라는 세계를 그림에 있어 말 그대로 ‘윤리적’으로. 다시 한번. 왜곡없이 ‘명징’하게 당대를 ‘직조’한다. 그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더없이 ‘윤리적’인 영화다. 비윤리적 이미지라는 선택을 통해 윤리적 재현의 결과물에 도달한 이 작품은 영화의 소재가, 주제가, 이미지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관점에서 어떻게 비칠까.       

언피씨(PC)한 피씨(PC)를 가능케 하는 기이한 사례 1     

 ‘윤리’만큼이나 자주 소환되는 단어는 ‘PC’일 것이다. 번역어로는 ‘정치적 올바름’ 정도로 쓰이는 이 단어는 명확한 규정과 정의가 없다는 데서 난처함이 발생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되어 있다. 거의 ‘윤리’와 비슷한 같은 범용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PC는 분명 많은 순기능을 가졌다. ‘차별적’, ‘혐오적’ 언어의 사용을 통제해 최소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알림벨 역할을 해내고, 우리 사회에 배척되고 소외된 이들을 포착해 내 논의의 장으로 불러올리는 파수대 역할을 해낸다는 점에서 분명한 순기능을 지녔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 영역에서 PC가 필요한 이유다. 재현물에서 얼마나 이 작품이 ‘PC’ 한지가 해당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면, 얼마나 ‘윤리적’ 인가를 따지는 기준과 같은 방식의 난처함이 발생한다. 작품이 지닌 활력, 이미지나 혹은 표현이 주는 매혹, 어떤 금기나 트라우마를 마주 하거나 혹은 파괴하고 있는 것을 지켜볼 때 느끼는 당황스러운 전율, 관념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선입관이 부서질 때 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충격. 이것들은 모두 작품 바깥의 우리가 여전히 예술작품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이 즐거움들이 이른바 ‘PC’ 하지 않다면. 지금의 경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지지하기 어려워진다. 작품 자체가 불온한 기운을 가졌다면 그것이 ‘불쾌’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도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일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이라고 말하려면, 그것이 성공적으로 완결되지 못하고 미학적으로 모자란 결과값으로 작품에 반영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하물며, 그 ‘불온한 기운’ 자체가 작품의 에센스라면, 이때는 어떻게 할 것 인가.        


 아예 조금 극단적인 두 가지의 사례를 보자. 먼저, 아동-청소년소설 작가 김경은이 2020년 겨울 계간지 <작가들>에 발표한 청소년 소설 <오늘의 드로잉>이다. 굳이 청소년소설을 고른 이유는, 교육용 텍스트로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청소년 소설의 장르적 특성과 일선 교육현장에서도 적극적인 PC에 기반한 교육(양성평등 교육, 성인지 감수성 교육등)이 진행되는 최근의 흐름을 결합해 보았을 때 청소년 소설이야 말로 ‘PC’의 최전선에 서는 작품처럼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경은은 <오늘의 드로잉>에서 계속 보는 이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 난처함, 그러니까 이 ‘불온함’이야 말로 <오늘의 드로잉>의 에센스이자, 기계적 의미에서의 ‘PC’ 이후의 논의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활력이 된다.     


 <오늘의 드로잉>은 그 자신의 성적 지향성(레즈비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15세의 미술반 학생 ‘아영’이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점잔을 뺄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소설의 첫 네 문장은 이렇다. “나도 남자랑 자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뒤로 물구나무 서기 자세로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난 그 사실을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논쟁적 이슈의 측면에서 극히 ‘PC’하며 동시에 페미니즘 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주인공 아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 ‘김지온’이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자 슬픔에 빠진다. 아영은 지온과 커플티셔츠를 맞춰입고 얼마 후 있을 ‘퀴어 퍼레이드’에 함께 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지만 지온이 남자친구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 꿈이 깨진 것을 알고, 함께 퀴어 퍼레이드에 갈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작가 김경은은 이때부터 주인공 아영의 여자친구 만들기 대소동을 아영의 1인칭 시점으로 중계하며 ‘PC’함과 ‘언 PC’ 함 사이를 계속 왕복한다. 아영과 비슷한 아이돌 취향과 문화적 취향(관객이 1천명도 들지 않은 예술영화를 각자 보았다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 ‘태주’와 키스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상상해보고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한 뒤 아영은 자기 자신을 명료히 규정한다. “내가 여자 얼굴을 따지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는 사실” 


 적어도 한국의 사례에서, 성소수자는 오랫동안 소거된 대상들이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 존재하나 호명되지 않는 존재. 이런 인식이 ‘차별’임을. 즉 성소수자를 대하는 기존의 방식이 윤리적 기준점에 미달한다는 것이 확정된 뒤로 성소수자는 이전에 비해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세계에 진입했다. (물론 여전히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함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소수자 차별’이 옳지 않다는 윤리적 전언은 강력하게 작동했지만 그러면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할 지의 논의가 빈약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성소수자는 ‘차별받지 말아야 할 대상’, ‘보호의 대상’, ‘이 세계가 반윤리적이며 불공정하고 폭력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상’이라는 기능적 방식의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성소수자는 타인에 의해서 비평되고 규정되고 보호되고 설명되고 해석되고 연대되는 대상이 아니라, 한 명의 오롯한 당신이다. 이 ‘오롯함’은 무결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태생적 한계들, 불온한 욕망에 흔들리는 감정들을 지닌. 관념적 세계에 존재하는 추상이 아니라, 바깥의 사람들이 보고싶은 대로 규정되는 물질이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오롯함이다.      


 다시 <오늘의 드로잉>으로 돌아오면, 주인공 아영은 친구 태주를 대상화하고 있다. 철저히 대상화 한 뒤, 자신의 판단 기준에 의거해 여자친구 가능 리스트에서 태주를 지워버린다. ‘대상화’ 역시 PC의 관점에서 극렬하게 비판하는 요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상화는 ‘대상화는 나쁜 것’이라는 윤리적 판단보다 먼저 이미 머릿속에서 완료된다.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역시 대상화의 한계를 넘기 쉽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타인을, 사물을, 환경을, 생각을 인식하는 한 나 아닌 다른 것은 대상화의 절차를 거쳐서 인식된다. 작가 김경은은 성소수자인 아영이 태주를 대상화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성소수자가 ‘PC’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아영은 ‘언 PC’해지지만 그럼으로서 더욱 다층적인 인물이 된다. 동시에, 규정된 물질로서의 부유하는 성소수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한 명의 인간으로 지상에 착륙한다.      


 대상화를 통해 태주를 리스트에서 지운 아영은 역시 대상화를 통해 공략대상으로 지정한 다른 반 학생 ‘임혜수’에게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플러팅’을 한다. 아영이 임혜수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은 앞서 태주와의 에피소드 보다 더욱 노골적이다. “그 애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아영은 대상인 임혜수의 눈매와 입술에 대한 이른바 ‘얼평’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오늘의 드로잉>은 더욱 곤란한 지경으로 보는 이를 몰고 간다. 같은 학년 모든 반을 헤집고 다니며 플러팅하는 아영은 역으로 자기 보다 한 살 많은, ‘목사 집 딸 레즈비언 선배’에게 플러팅을 받는다. 아영은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다.      


 작가 김경은은 성소수자인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도록 설계하지도, 아영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설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 결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PC’ 레이더에 빨간불이 들어올까 말까 문장 하나하나 전전긍긍 하기보다, 자기가 만든 인물이 말 그대로 ‘도구화’ 되지 않도록(이것이야 말로 작가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에게 저지르는 반윤리 아닌가) 그 인물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결단이야 말로 윤리적이라고 믿는다. 김경은은 ‘PC’ 적 인식보다 청소년 소설 이라는 장르적 한계와 제약 안에서 작가적 용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역설적으로 정말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과 표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이 ‘올바르다’라고 직설적으로 가르치는 건 작품이 아니라 교육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고, 창작물이 교육의 역할을 대체하려 드는 순간 창작물은 경직된다. 창작물이 교육적 역할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순간, 창작물은 창작물로서가 아니라 교육의 교보재로서 성격이 뒤바뀌어 버린다. 과연 그것이 더 나은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의 발화점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언피씨(PC)한 피씨(PC)를 가능케 하는 기이한 사례 2     


 그렇다면 이제, 영화적 극단의 사례를 보자.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과 출신의 영국 코미디언 사샤 바론 코헨은 카자흐스탄 TV 리포터 ‘보랏 사그디예브’라는 자신이 생성한 캐릭터를 통해 블랙 코미디 시리즈 <보랏>을 만들었다. 1편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이하 <보랏 1>)는 2006년, 2편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 필름>(이하 <보랏 2>)은 2020년에 제작되었다. 보랏 1편과 2편은 앞서 이야기한 ‘창작물’과 ‘교보재’에 들어맞는 사례다. 그 이야기는 영화적 활력과 도발, 우회적 사유의 가능성까지 모두 1편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소리다.     


 <보랏 1>에서 주인공 보랏은 등장하자마자 카메라를 보며 이야기한다. “저는 보랏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좋아요. 섹스도 좋고요. 기분 죽이죠”. 그리고 영화는 곧장 보랏이 사는 마을 ‘쿠즈세크’를 스케치한다. 보랏의 옆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지나가는 ‘우르킨’은 마을의 강간범이고, 마을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총을 메고 있다. 보랏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 무크타르 사카노브는 마을의 수리공이자 낙태 의사다. 보랏은 집으로 들어가 나탈리아라는 젊은 여성과 키스를 한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제 동생이죠. 카자흐스탄 전국에서 4등을 차지한 매춘부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곤 자신의 어머니 옆으로 다가와 마을에서 가장 최고령자이며 ‘43세’(배우는 완연한 노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말 그대로 ‘언 PC’의 무더기. 그런데 이쯤 되면 영화는 어느 순간 거대한 코미디가 된다. 동시에 이 ‘농담’의 소재가 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우리의 일상에 실존하는 것(이를테면 내전중인 국가들에서 징발되는 ‘소년병’ 이슈) 임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지독한 풍자가 된다. 보랏의 마을 자체는 하나의 부조리한 코미디가 되고 이 부조리한 코미디가 현실과 접속하고 있음이 증명되는 순간 보랏은 ‘교육’이 아닌 ‘창작물’의 영역에서 광폭한 메시지를 말 그대로 집어던진다. 농담으로서나 할 법한, 그것도 지독한 농담에서나 할 법한 이슈들이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데 과연 어쩔 것이냐 하는. 파괴적 웃음 뒤에 난처한 질문을 숨긴 이 작품은 그럼 ‘PC’한 작품인가 ‘언 PC’한 작품인가.     


 <보랏>은 카자흐스탄 TV 리포터가 미국에 가서 미국의 문화를 배우고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취재하는 이야기다. 그중 한 에피소드는 실로 무시무시하다. 어느 교양있는 상류층 저녁 모임에 초대받은 보랏은 ‘친구’를 데려와도 된다는 안내를 사전에 받고, ‘에스코트 서비스’에 전화한다. 잠시 후 ‘루넬’이라는 여성이 보랏이 있는 모임 자리에 도착하고 모임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피한다. 보랏이 루넬에게 디저트라도 주라고 부탁하자 모임의 호스트는 보랏과 루넬을 내쫓고 경찰을 부른다. 보랏은 의기소침한 루넬에게 대신 사과하고, 루넬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다. 보랏은 루넬을 집에 데려다 주고, 집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루넬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보랏이 사랑한다는 사람은 보랏이 TV에서 본 배우 파멜라 앤더슨이다) 완곡하게 거절한다.      


 자 그렇다면 다시 되짚어 볼 차례이다. 에스코트 서비스로 온 ‘루넬’을 박대하는 ‘상류층 모임’ 사람들과, 루넬에게 어떤 편견 없이 정중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보랏 중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인가. 급기야 보랏은 엔딩에서 루넬과 결혼한다.사회적 맥락에서 정교하게 규정된 ‘에티켓’ 같은 인텔리한 의미에서의 도덕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것. 사람의 신분과 직업으로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천부인권의 측면에서 누가 더 도덕적인 사람인가. 음담패설과 도착적 행동을 일삼는 보랏보다,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편견을 통제하고 선입견을 억제하며 우리안의 혐오를 절제하는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극도의 언 PC로 일관하는 <보랏 1> 보다 동시대의 현실인식은 더 ‘PC’하다고 정말 자신할 수 있는가?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예술과젠더연구소의 학회지 <NW 4.5>를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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