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발제문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영화는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이 영화는 1975년 영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이 더 넘은 영화네요. 그때 태어난 사람이 지금은 중년이 되었을테니까. 영화 자체도 참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 풍속들이 계속 보이니까요.
그런데, 조금 재밌는 것은 당시 이 영화는 ‘청년세대’ 영화의 일환으로 꼽혔습니다. 이 작품은 사실 영화와 소설. 두 가지 예술의 장르가 끊임없이 연결되던 70년대의 특수한 일련의 상황 속 에서 등장한 작품인데요. 너무 순차대로 정렬해서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두서없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70년대의 이른바 ‘대중소설’로 불리는 일련의 세태풍자 소설들은 영화로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이를테면. 70년대 영화 중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작품인 <영자의 전성시대>는 소설가 조선작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이 소설을 쓸 때 조선작은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작품은 <지사총>과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두 편의 단편을 묶은 연작단편인데. 두 작품 모두 ‘호스티스’가 등장합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소녀들이 점점 사회 밑바닥으로 내몰리다가 결국 호스티스로 전락한다는. 사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감독 김호선이 1975년에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발표 2년만에 영화화가 되었으니까. 발표되자 마자 영화화 작업에 들어갔다고 봐야할 것 입니다. 김호선이 이 작품을 만들때는 서른 네살. 김호선의 두 번째 작품이었습니다.
그보다 1년전에. 그러니까 1974년에는 이장호가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장호가 29살 때 만든, 데뷔작입니다. 사실 이 나이에, 장편 감독 데뷔를 한다는 건 매우 드문일 입니다. 게다가 기록적인 히트를 기록한 영화였죠. 지금이야 잘 하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을 줄곧 따라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 순진한 소녀가 첫사랑에 실패하고 어느 중년남자의 후처가 되었다가 임신한 과거 때문에 이혼하게 되고 이후에 알게 된 남자 때문에 호스티스가 되었다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것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지만 그 남자마저 떠나버리자 결국 죽어버린다는, 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영화인데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한. 호스티스 멜로 영화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가 바로, 최인호입니다. 이장호 감독과 최인호 작가는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자연스럽게 이장호 감독에게로 기회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인호가,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원작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도 술마시기 대회 심사위원으로 얼굴을 비춥니다. 이 소설 <바보들의 행진>은 일간 스포츠의 주간 연재물이었는데. 아주 짧은 이야기. 거의 콩트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였습니다.
70년대 문학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러니까 조금 더 대중친화적이고 세태풍자적인 방식으로 시대상을 이야기하는 대중소설 노선으로의 작가들. 방금 말씀드린 조선작이나 최인호 같은 사람들이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조세희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시기이기도 합니다. 6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이른바 한글세대들. 김지하, 김승옥 같은 작가들에 이어 70년대의 청년작가들은 물론 지금 보면 비판의 여지, 한계성이 뚜렷하게 보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계층, 청년세대들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들은 영화와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젊은 세대 소설가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시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실제 김승옥만 하더라도. 김승옥의 위대한 소설들은 사실 거의 60년대에 모두 출판되었고 김승옥의 70년대는 영화판에서 각색, 각본작가로 활동했던 시간입니다. 본인의 작품 <무진기행>을 각색한 김수용의 <안개>의 각본을 시작으로 <영자의 전성시대> 각본도 김승옥이 썼습니다. <영자의 전성시대> 감독인 김호선의 차기작이자 기록적인 흥행작인 <겨울여자>의 각본도 김승옥이 썼습니다. 물론 중간에, 1977년에 쓴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을 받기도 하죠. 진짜 대단한 작가라고 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기회를 잡아 일련의 영화들을 발표하면서. ‘뉴웨이브’까진 아니어도 유의미한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 선언을 한 주체가 된 집단을 ‘영상시대’ 라고 부릅니다. <영자의 전성시대>를 만든 감독 김호선, <별들의 고향>을 만든 감독 이장호,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시리즈로 신파 아동영화의 신기원을 쓴 감독 이원세. 훗날 이원세는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영화화 합니다. 또한 시나리오 작가이면서 감독이었던 홍파, 영화평론가 변인식,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의 감독 하길종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청년문학 세대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부지런히 영화화 하고, 또 새로운 영상미학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이전까지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독창적인 방식으로 움직였던 작가가 하길종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대략적인 분위기는 이렇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말씀드린건 문화예술의 분위기이고. 사회분위기는 한마디로 살벌했습니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합니다. 1973년 8월에는 당시의 유력 야당지도자이자 차기 대권후보였던 김대중을 납치해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다 CIA의 반대로 살해는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반유신운동이 확산되고 1974년 1월에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공표됩니다. 그리고 세달 뒤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가 불순한 세력의 사주를 받아 암약하고 있다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됩니다. 3호는 근로소득세 면세, 사치성 품목 조세 가중 등의 민생조치입니다. 그리고 그 ‘불순한 세력’의 정체가 ‘인혁당 재건위’라고 발표합니다. 1964년에 발생했던 ‘인민혁명당 사건’때의 그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불순분자들이 있고 그들이 대학생들을 조종했다는 그림인데, 인혁당 재건위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1975년 4월 8일에 사형이 대법원으로부터 확정되고, 바로 18시간 뒤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달을 조금 지나 1975년 5월 31일에 <바보들의 행진>이 개봉했습니다.
하길종은 1941년생입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는데, 서울대 문리대 59학번부터 61학번까지는 훗날 한국문학, 영화에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 포진해 있던 학번입니다. 김지하, 김승옥, 이청준, 김광규, 김화영, 오세영 같은 작가들. 거기에 김현, 염무웅 같은 평론가들. 거기에 감독 하길종도 이 안에 포함됩니다. 이 시기에, 서울대 문리대에 출강하던 강사가 50년대 당대의 문학권력자인 소설가 김동리와의 논쟁으로 일약 스타가 된 이어령 이었습니다. 하길종은 1965년에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1970년에 귀국하는데. 유학시절에 만든 단편 <병사의 제전>은 한 해 영화과 학생이 만든 가장 훌륭한 작품에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하길종 감독과 함께 공부한 감독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입니다. 훗날 <대부>라는. 걸작 느와르 영화를 연출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하길종이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연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게요. 1965년에 대학원에 입학해 1970년에 돌아왔다. 하길종이 있던 곳은 미국입니다. 이때 미국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베트남 전쟁 기간입니다. 동시에, 히피문화와 저항정신이 폭발하던 시기입니다. 또한, 68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불지펴지기 시작해 터져나오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누벨바그’라는. 영어로 바꾸면 ‘뉴웨이브’에 해당하는 새로운 영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예술사적으로도 대변혁이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이곳에서 하길종은 당연히 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고 듣고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1970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하길종이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를 한번 상상해 볼게요. ‘아무것도 바뀐게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의 정보통제는 적어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옆나라 일본만 해도 68혁명의 불꽃이 튀어 60년대 학생운동이 극단으로 까지 치달아 종국에는 자기들끼리 때려죽이는 막장극이 발생할 정도였는데, 이 시기를 다룬 되게 재밌는 소설이 무라카미 류의 <69>죠. 하여튼, 한국에서도 물론 학생운동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장발, 청바지, 통기타 같은 낮은 단계의 청년 문화 정도에서 낙착을 본 모양새였죠. 그리고 하길종은,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유학파 출신 감독 하길종은 1972년에 이효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분>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진짜 기괴하고 난해한 가족영화인데요. 물론 흥행에서 대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영화 역시 매우 기이한 영화 <수절>이었습니다. 물론 흥행에서 실패했고요. 하길종이 흥행감독으로 자리매김 한 작품이 바로 세 번째 영화 <바보들의 행진>.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영화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 있으면 좀 웃긴 기분이 드는 장면들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첫 부분. 주인공들이 입영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아마도 징집대상자들의 성기 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에서 이걸 검사하는 군장교가 배우 윤일봉입니다. 윤일봉은 50년대 중반부터 주연급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영화계의 스타입니다. ‘미남배우’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윤일봉이 우스꽝스럽교 어딘가 표독스러운 입영관리관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키득키득 웃음이 나는 장면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군대의 느낌을 굉장히 ‘가학적인’. 물론 가벼운 터치이기는 합니다만 ‘사디스트 적인’ 느낌으로 그려넣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군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해도 창작자가 남산에 끌려가진 않겠지만. 75년 당시 엄혹한 군사정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대범한 방식이었을 겁니다.
이 징병검사 장면에서 계속 사운드트랙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은 송창식의 <고래사냥> 연주곡입니다. 하길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만난 대학생들로부터 송창식을 소개받았고, 이 영화를 위한 음악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송창식이 준 노래가 <왜 불러>와 <고래사냥>입니다. 징병검사 장면에 연주곡으로 흘러나오던 <고래사냥>은 영철이 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사실은 자살하는 장면에선 육성과 흘러나오면서 정서적으로 대단히 충격을 주죠.
장발단속을 피해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장면 뒤에 <왜 불러>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국영화사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원래는 이 노래가 쓰일 자리가 없었습니다. 시나리오 상에도 있지 않은 장면이었습니다. 하길종은 <왜 불러>가 노래는 좋은데, 이걸 마땅히 쓸 장면이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길을 걷다가 실제로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렸습니다. 경찰이 뒤에서 쫓아오고 소리를 지르고 하다가 순간 하길종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경찰이 나를 왜 불러.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게다가 이 장면은 괴상하리마치,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코미디 영화처럼 반복되는 것 같아 보이게 찍혀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채플린의 영향 일 것 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이라는 시대의 풍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판본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검열로 날아가 버린 자투리 필름들. 당시 검열은 상영용 복사본의 필름을 잘라 버린게 아니라 원본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한번 검열로 날아가버린 장면은 어떻게해도 볼 수가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자투리 필름이 보관되어있던 창고를 뒤져서 원래의 시나리오를 참고해 이 장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붙인 복원판입니다. 휴교령이 내려진 캠퍼스의 풍경 같은 장면은 원래는 날아가버린 장면이었습니다. 당연히 당대 권력에서. 대학생들이 계속 무기력하게 말을 더듬고, 결국은 자살해버리고, 교수에게 찾아가 학점을 고쳐달라 하는. 말 그대로 '저속한'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당대의 검열관들은 단순히 박정희 욕했다고 자르는 기준이 아니라 영화의 은유적 함의들도 ‘읽어내어서’ 잘랐습니다. 더더욱 악질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길종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만들 수 없는 당대의 환경에 절망했습니다. 처음 만들었던 두 편의 영화. 물론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네아스트 파졸리니의 영화들에 짙게 영향을 받은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실험영화 <화분>과 괴이한 영화 <수절>이 실패한 이후. 결국 이런 청춘세대의 세태풍자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자신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후 하길종의 영화들은 더더욱 막 나갑니다. 결국 이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만들고 4년 만에. 1979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영상시대 동인들의 젊은 영화들도 시름시름 기운을 잃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는 더더욱 활력없는 80년대 술집 영화로 전락하게 됩니다. 6월 항쟁 직전까지 말이죠.
※ 이 발제문은 2018년,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천의 <대안공간 듬>에서 진행된 세미나 <한국영화의 뉴웨이브_돌연변이들>을 위해 썼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바보들의 행진>의 정성일, 달시 파켓 코멘터리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