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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Oct 04. 2022

할리우드에서 본 뮤지컬

뮤지컬 인어공주

수십 번, 수백 번 들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디즈니 인어공주 음악이 흘러나온다. 무대에서 배우들은 인어의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엄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디즈니 만화 속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Part of the World’ 노래 가사 마냥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한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순간이다. 그렇다. 난 지금 엄마와 함께 LA에서 오랜 기간 꿈꿔왔던 인어공주 뮤지컬을 보고 있는 중이다.




내 생애 최초의 뮤지컬 경험은 열일곱살 때였다.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 옥주현이 첫 주연을 맡은 뮤지컬 ‘아이다’를 봤다. 처음 본 뮤지컬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드라마, 영화처럼 재미난 스토리가 담겨 있으면서 성량 좋은 배우들의 노래를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대사를 노래로 전달하는 배우들의 열연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학교에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제출하던 일기장에도 첫 뮤지컬을 본 감동을 그대로 적어냈던 기억이 난다. 담임선생님이 ‘엄마와 좋은 문화생활을 할 수 있어서 좋았겠다’라고 남겨 주신 답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 모녀의 뮤지컬 사랑은 시작됐다. 엄마와 나는 주기적으로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갔다. 뮤지컬을 보고 나면 공연 CD를 꼭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듣는게 우리의 뮤지컬을 보고 난 후의 의식이었다. 우리는 차 안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들으며 그날 공연을 통해 전달받은 감동을 극대화시켰다. 그때의 우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뮤지컬 세계라는 가상의 공간을 둥둥 날아다닌다. 엄마와 함께 손잡고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환상적인 공간에 빠져버린 느낌이 든다.

 


스무살에 친구와 뉴욕 여행을 떠났을 때 난 천국을 경험했다. 맨하탄에는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가 있었고, 덕분에 난 매일 아침 티켓부스 앞에 줄을 서서 50% 할인된 가격으로 당일 뮤지컬 공연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50달러~70달러를 지불하면 당일까지 팔리지 않은 VIP 좌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무살 여행객에게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나와 친구는 여행 기간 동안 딱 두 편을 선별해 뮤지컬을 감상했다. 그 중 하나가 '인어공주'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공연장에서 '인어공주' 뮤지컬을 보며 난 한국에 있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도 이곳에 와서 이 뮤지컬을 본다면 감격할텐데! 엄마에게 내가 뮤지컬에서 받은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었다. 디즈니 만화 속 인어공주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이 체험을 엄마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선물하고 싶어 공연 CD를 샀다. 그리고 그 CD는 우리 엄마가 차에 탈 때마다 찾는 음악 CD 1순위가 됐다.




엄마의 이야기


엄마는 딸이 사다준 인어공주 CD에서 마녀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무대 위의 마녀를 상상하곤 했다. "인어공주 뮤지컬에서 마녀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인물인지도 몰라. 마녀의 노래에는 힘이 있어. 마녀를 맡은 배우가 가장 성량이 좋아야 해." 50대의 엄마는 '인어공주'에서 나오는 마녀의 노래 'Poor Unfortunate Souls'를 들으며 여전히 10대 소녀같은 표정을 지었다.


You poor unfortunate soul (이 가엾고 불쌍한 영혼)

Go ahead (어서 해)

Make your choice (선택을 해)

I'm a very busy woman (난 바쁜 사람이야)

And I haven't got all day (하루 종일 여기에 매달릴 수는 없어)

It won't cost much (대가가 큰 것도 아니잖니)

Just your voice (단지 목소리를 주면 돼)


인어공주에게 목소리를 빼앗기 위해 유혹하는 마녀의 노래는 단연 '인어공주' 뮤지컬에서 명장면 중 명장면이다. 마녀는 인어공주를 간드러지게 유혹하는 동시에 섬뜩할 만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이 노래는 강약 조절이 필수다.


엄마는 마녀의 노래를 실제로 들을 날만을 꿈꿨다. 딸의 졸업식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뉴욕여행을 떠났을 때 드디어 마녀의 노래를 들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브로드웨이에서 인어공주 뮤지컬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어공주 뮤지컬을 볼 수 있는 날은 아예 다가오지 않는 걸까? 



엄마는 몇 년 전 차를 바꾸는 과정에서 딸이 과거에 사다준 인어공주 뮤지컬 CD를 잃어버렸고, 차에 탈 때마다 어디론가 증발한 인어공주 CD가 떠올랐다. 비록 뮤지컬을 실제로 볼 순 없다해도 CD라도 들으며 갈증을 달랬는데, 이젠 어쩐단 말인가. 엄마는 딸에게 인어공주 CD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다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 그러던 어느날 딸이 아마존에서 인어공주 뮤지컬 CD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이번 여름 한국에 방문했을 때 CD를 가져다줬다. 


방 안 침대에 홀로 누워 인어공주 CD를 들으며, 엄마는 상상 속 인어공주 뮤지컬 세상에 들어간다.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


엄마는 대학시절 연극부 활동을 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연극을 할 때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엄마는 그 감각을 사랑했다. 현실을 잊고 환상 속 세상을 거느리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학로의 한 연극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을 때 엄마는 차마 그 제의에 응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꿈과 현실 중 현실이 더 중요했다. 다만 연극을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해서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을 주기적으로 보면서 그 사랑을 이어갈 뿐이다. 무대에 직접 오르진 못해도 관객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으로도 엄마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인어공주 뮤지컬 공연 일정은 엄마의 생일주간에 예정돼 있었다. 생일 당일은 사진촬영 및 저녁식사를 할 계획이어서, 엄마의 환갑 생일 다음 날로 뮤지컬 공연 티켓을 예매했다. 엄마와 나, 단 둘이서 뮤지컬을 보러가는 건 실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면 나 아니면 엄마가 꼼짝없이 아이 둘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단 둘이서 외출을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국에서야 말로 엄마와 나의 단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공연 당일 네비게이션이 일러준대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그 어디에도 뮤지컬 공연을 할 법안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엄마와 골목길을 배회했다. 그러다 공사장 인부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공연보러 왔어요? 저기로 가보세요." 아저씨가 가르키는 곳을 향해 걸어가보니 인어공주 뮤지컬 배너가 보였다. 문을 쓱 열어보니, 흡사 대학로 공연장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할리웃에 대학로 공연장이라. 처음 경험하는 광경이었다. 엄마와 대학로 공연장과 너무 비슷하다며 키득댔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총 5열로 구성된 관객 좌석. 대략 30~40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과연 이렇게 조그마한 공연장에서 하는 뮤지컬의 수준은 어떨지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왕 시간 내서 보러왔는데,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은 기대 이상이었다. 인당 40달러의 저렴한 가격 치고 훌륭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장이 작아서 무대와 쌍방으로 소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뮤지컬 인어공주의 넘버들은 어린 시절부터 디즈니 만화를 통해 워낙 유명한 곡들이라 음악에 맞춰 흥얼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내가 가장 기대했던 마녀가 카리스마 있는 외모에 노래도 멋드러지게 소화했다.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뮤지컬 공연을 볼 때면 늘 느끼던 카타르시스가 그 날도 찾아왔다. 인생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까. 난 때때로 번아웃과 매너리즘을 느끼며 일년 중 몇날 며칠은 허무함과 쓸쓸함에 우울모드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뮤지컬 공연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오래도록 꿈꾸던 인어공주 뮤지컬을 할리웃 극장에 앉아 함께 볼 수 있다니, 내 인생 참 멋지다. 이만하면 아주 만족스럽다, 는 그런 생각. 이 경험이 두고두고 내 인생에서 꺼내볼 보석같은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 기억은 절망스러운 순간에서도 나를 꺼내줄 마법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은 관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사코 거절하는 엄마를 설득해 엄마와 마녀의 투샷을 찍었다. 우리의 오랜 소원이 이뤄진 날이니, 기념해야 마땅했다. 그날도 우리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어공주 뮤지컬 OST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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