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 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해요."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니.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맥베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세하는 텅 빈 자신의 방으로 하지혁을 불렀다. 그는 오늘도 마음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항상 미소가 걸려 있는 입가에는 미소 대신 약간의 긴장감이 걸려 있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무척 세심하고 신중하게 처리되어야 하는 일. 트라우마를 삭제한 환자들을 관리하는 일. 세하는 그 일을 하지혁에게 맡겼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누군데요?”
세하는 노트북을 하지혁 쪽으로 돌렸다.
“엘리. 새로운 파트너야.”
화면 속 여성이 하지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픽과 실사의 경계이면서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조형미를 갖춘 여성이었다.
“인공지능?”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지능 심리 상담사.”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에서 이런 모델을 만든 적 있어요. 군인들의 우울증, 트라우마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서요.”
“동일해. 진짜 심리 상담사와 다른 건 모니터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뿐이야.”
세하는 엘리는 30대 중반의 전문직 여성으로 설정했다. 장밋빛 피부에 갈색 눈동자, 눈동자와 어울리는 진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었다. 그리고 파란색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알이 자그마한 진주 귀걸이를 한 모습으로 설정했다.
“이 친구가 제 새로운 파트너인가요?”
“응. 일상적인 상담에는 엘리를 이용해 줘. 환자 데이터는 완벽하게 반영했어. 상담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 환자의 언어 특징 같은 건 자동으로 업데이트될 거야.”
의사들은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리는 데 급급해서 환자의 이야기를 대충 듣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환자를 재단하는 일이 흔했다. 불성실한 태도로 환자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 상담사는 인간보다 객관적으로 정보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엘리는 환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거야.”
20분의 상담 시간을 넘겼다고 눈치를 주지도 않고, 어렵사리 털어놓은 비밀을 가벼운 사건 취급하지도 않을 것이다. 때문에 환자들은 엘리에게 더 많은 걸 털어놓을 것이다. 세하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였다. 환자들의 회복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내밀한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줄 유능한 상담사가 필요했다.
“난 환자들이 더 많은 걸 털어놓고 더 빨리 자유로워지길 바라.”
하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스의 이야기에 완벽히 동의했다.
“그런데 이름이 엘리인 이유가 있나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
세하는 싱긋 웃었다.
“영화 콘택트의 여주인공 엘리 애로웨이에서 따왔어. 마음에 들어?”
“난 당신을 좋아해요.”
세하는 무심결에 말을 잃고 하지혁을 응시했다. 떠나는 날까지도 그 티셔츠 차림인 남자. 세하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이 적힌 그의 티셔츠를 볼 때마다 발을 허공에 내딛는 것 같았다. 과연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마음이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당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라는 거 알지만.”
세하는 하지혁을 응시했다.
“만약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내 친구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아요.”
“일이 끝난 뒤에도 당분간은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만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덫에 걸린 쥐처럼 절망적인 심정으로 하지혁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날 좋아해 줄 필요 없어.”
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편이 나아.”
갑자기 실내 온도가 적어도 3도는 내려간 듯했다. 하지혁은 기분 나쁜 서늘함이 느껴지는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별 인사치고는 꽤 강력하네요.”
세하는 그 말에 아주 살짝 웃었다.
“난 당신의 그 솔직함이 좋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소년 같은 면이. 당신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됐어. 적어도 당신은 날 속이지 않을 것 같아서.”
세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두꺼운 사진집을 하지혁 앞에 내밀었다.
“이별 선물이라도 주는 거예요?”
“비슷해. 화이트 샌즈 내셔널 모뉴멘트. 세계에서 가장 큰 석고 언덕 사막 사진을 모아 놓은 거야. 서울 면적과 거의 맞먹는 크기에 달하는 하얀 사막이야. 미국에 있을 때 이곳에 갔었어.”
하지혁은 사진집을 펼쳤다. 땅도 길도 벌판도 언덕도 온통 흰색이다. 마치 흰색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 거대하고 새하얀 모래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혹은 구름 위, 혹은 천국, 혹은 꿈같은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뭘 봤어요?”
“나의 내면.”
하지혁은 세하를 응시했다. 그녀의 쌍꺼풀 없는 길고 반듯한 눈을. 자신을 좋아하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여자. 세하가 자신의 마지막 계획에 그를 포함시키겠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매혹당했다. 마음속에 거대한 사막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막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어. 일행을 잃고 혼자 고립된 거야. 다시 일행들을 만나 합류하기까지 5시간이 걸렸어. 죽을 뻔한 그 5시간 동안, 나는 이 세상을 사는 기쁨을 그때 처음 느꼈어. 그전까지는 단 한 순간도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전까지 나한테 삶이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거라고 믿었거든.”
사실이었다.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픈 곳 하나 없이 젊고 건강하다는 것이 치욕으로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막상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니까 살고 싶어졌어. 너무나 강렬하게. 그리고 깨달았어. 인간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끔찍한 트라우마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결국은 살고 싶다는 걸 말이야. 다른 사람처럼 이 세상 모든 걸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어.”
세하는 단숨에 뱉어 냈다.
“심지어 우리 엄마마저도.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살고 싶었을 거라는 걸. 인간의 그런 가장 절실한 의지를 함부로 빼앗은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았어.”
그게 ‘복수’라는 것을 하지혁은 이제 잘 안다. 이 아름다운 여자가 원하는 것이 끝끝내 파멸이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하지혁은 화이트 샌즈 사진집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만날 기회도 이유도 없을 자신의 차가운 여왕을 둔 채 돌아섰다.
희주는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냐고 묻는 무원의 문자가 화면에 떴다.
“파트너?”
아일랜드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주웅이 물었다. 주웅은 오전 진료를 마치고 예고 없이 오피스텔을 찾아왔다. 그때 희주는 리볼버와 별장 주변이 최대한 자세하게 나온 지도를 챙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단도를 하나 챙기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무원이 준 최루액 스프레이는 서랍 안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주웅의 방문에 일단 모든 것을 미뤘다. 주웅은 가볍게 샌드위치를 만들겠다며 장을 봐 왔다. 온기가 채 날아가지 않은 식빵과 질 좋은 햄 두어 종류와 양상추, 피클까지 가져왔다. 희주는 그 모든 것이 든 쇼핑백을 보며 할 말을 잃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희주는 무원에게 연락할 때까지 대기하라고 짧게 문자를 보냈다.
“컨디션은 어때? 병원에서든 집에서든 내가 좀 챙기고 싶은데.”
주웅의 태도는 늘 똑같다. 담백하고 솔직하다. 말에 저의가 있지도 넘겨짚지도 않는다. 그걸 인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죄책감을 들게 하는 그 태도가 종종 거슬렸다. 상대방의 선의가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일까.
“사실은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아직 해결 못 한 일이 있거든.”
“알아. 근데 이런 시간이 나한테 필요했어. 이렇게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당신의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짐작해 보는 시간이 너무나 간절해.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을게.”
희주는 주웅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후 말했다.
“난 처음부터 모든 걸 목격했어. 그리고 이젠 한 여자를 잡아야 해. 그 여자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해. 내가 먼저 잡지 않으면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을 거야.”
“당신은 이 사건에 너무 깊게 빠져들었어.”
“당연해. 내 사건이니까.”
주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는 편도체와 내측 전전두엽피질의 균형이 급격히 깨지면서 감정과 충동 조절이 훨씬 힘들어져. 편도체는 화재경보기고, 전전두엽피질은 감시탑이야. 화재경보기는 아무 때나 마구 울려 대고, 감시탑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지금 이게 화를 낼 일인지 그냥 넘어갈 일인지 제대로 판단을 못 해.”
“지금 내가 그런 상태라는 거야?”
“응급실에서 사람을 때린 이후부터 당신은 내내 그래 왔어. 옆에 있는 사람을 불안하고 힘들게 만들 정도로 최악의 상태야.”
희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사라고 잘난 척하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지껄이지 마.”
“쉬어야 해. 사건에서 손을 떼고 멀리 가 버려야 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안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그 일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해.”
“내가 사는 게 어때서? 난 형사야. 이건 내 사건이야.”
“사건은 당신이 맘대로 화를 내도 되는 면죄부 같은 게 아니야. 당신은 사건을 핑계로 여기저기 분노를 터뜨리고 다니는, 분노조절장애 환자일 뿐이야.”
희주는 주웅의 뺨을 때렸다. 쓴 액체가 위에서 식도를 타고 올라와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주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 줘.”
“마지막 말은 사과할게.”
“당장 여기서 나가 줘.”
주웅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실수했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었어. 미안해.”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이미 우리는 끝났어.”
“파트너 때문이야? 당신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당신 분노에 순순히 동조해 주는 그 파트너를 나 대신 선택하기로 한 거야?”
희주의 입에서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주웅은 빌어서라도 희주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희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대답과 같았다.
“어리석은 건 나야. 이미 오래전에 그걸 알면서도 당신을 그냥 뒀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한 내 탓이야.”
주웅은 천천히 걸어서 현관으로 향했다.
희주는 주웅을 외면했다. 자책하는 주웅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국 나쁜 건 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내버려 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것만 빈자리에 끼워 넣으면 퍼즐은 완성되고 인생은 충만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퍼즐은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빈자리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널 기다렸어.”
어둠 속에서 희주는 말했다. 세하를 향해 리볼버를 겨눈 상태였다. 여전히 세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끔찍한 것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뭉크는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뭉크는 고통스러웠다. 불행한 시간은 어린 뭉크를 마치 채찍처럼 매정하게 때렸다. 그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뭉크의 내면은 침잠했다. 그리고 병들었다.
세하는 뭉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병든 아이’였다. 모친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친의 폭력과 무관심에 시달렸다. 수녀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래도 결국 아이는 혼자였다. 혼자 모든 걸 감당했을 것이다. 천재 의사의 내면에 아픈 아이가 산다. 희주는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이 어쩌면 형사로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희주는 참담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아직, 20년 전 그 일이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눈물은 그때 흘려도 충분했다.
“결국 여기서 만날 줄 알았어.”
희주는 천천히 세하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리볼버를 고쳐 들었다.
“네가 뭘 하려는지 알아. 난 그걸 막을 거야.”
세하는 희주를 응시했다.
“거짓말.”
“뭐?”
“당신이 더 좋아하면서. 내 덕에 즐거웠잖아. 나쁜 놈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기쁘지 않았어?”
“헛소리하지 마.”
“칭찬해 주고 싶어.”
“뭐?”
“경위님은 우등생이군요.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오늘 길이 순조롭진 않았을 텐데 무사히 만나게 되어 감동이 밀려오네요.”
세하는 왼손으로 오른손 손등을 살짝 쳤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작은 박수.
“복수는 여기서 끝내. 내가 제대로 이 사건을 파헤치고 마무리하게 해 줘. 그다음에는 온 힘을 다해 널 도울게.”
“그 말, 진심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 진심이야.”
“하지만 당신은 몰라.”
“뭐?”
“달라지는 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삶은 이미 끝나 버렸어. 세하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려던 일을 했다.
“조금 번거로운 일이 생겼지만, 상관없어.”
세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메스로 리볼버를 쥔 희주의 손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