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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30화

30 지옥은 뇌 안에

"엄마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엄마가 나약했기 때문일까요?”

by 김은주

해결되지 않고 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것에 인내를 가지고 그 의문들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 의문들이 현재를 살도록 하라. 훗날 언젠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조금씩 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선배?”

내 파트너의 목소리. 지하실에서 날 꺼내 줬지.

“정신이 좀 들어요?”

희주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집인가?

“여기가 어디야?”

몸에는 한 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병실이에요.”

무원이 대답했다.

“강희건은?”

“괜찮아요. 대신 쇼크가 심해서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에요.”

희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원을 보았다.

“박세하는?”

별장에서 있었던 일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아직은 그 조각들을 제대로 맞출 힘이 없다.

“조사받는 중이에요. 의료법 위반, 살인 미수.”

희주는 이제야 긴 싸움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끝났어.”

무원은 희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박세하는 나랑 한 약속을 지켰어. 그리고 난 또 죽을 뻔했어. 하지만 또 죽지 않았어.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느껴진 것은 처음이야.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네 얼굴은,”

희주는 무원을 응시했다.

“환상 같아. 꿈같고.”

“환상도 꿈도 아니에요. 난 선배 옆에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아요.”

“박세하는 선물을 준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희건에게 선물을 줄 거라고 했어.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선배가 자는 동안 선배 애인이 왔다 갔어요. 강희건의 상태를 알려 주려 왔다가 선배가 자고 있으니까 그냥 갔어요.”

“…이젠 아냐.”

“뭐가요?”

무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헤어졌어. 내가 다 망쳤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무원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박세하는 강희건의 뇌에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삽입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까다로운 곳에 삽입을 해서 섣불리 두개골을 열고 제거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해요. 현재로서는 경찰 조사도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또 미친 손을 선물했을까요?”

“그런 게 아닐 거야.”

“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닐 거야. 박세하는 강희건에게 피해자들의 고통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무원은 붕대를 감은 희주의 왼손을 쓰다듬었다.

“강희건은 회복하는 대로 죗값을 치르겠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네?”

“넌 강희건이 지은 죄에 상응하는 충분한 처벌을 받을 거라고 믿어?”

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고쳐야겠죠.”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난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어. 그럴 때면 내가 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어. 우린 대체 뭘 위해 이러는 걸까?”

“오겠죠. 우리가 못 보더라도. 그렇게 믿어야죠. 그리고 계속 요구해야죠. 우리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날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팀장 소식은 없어?”

“전혀요. 여전히 소재가 불분명해요. 강력3팀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탐문 조사를 하고 있어요.”

희주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지만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맙소사. 몸이 완전 엉망이야.”

“무리하지 말아요. 최소한 일주일은 병원 신세라고 하니까.”

“일주일? 미치겠네.”

무원은 희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나와?”

“그 지하실에서 선배를 찾았을 때 깨달았어요.”

“뭘?”

“좋아해요.”

희주는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면 항상 나타나는 이 남자.

“죽다 살아나서 듣는 고백은 좀 특별하게 들리네.”

“받아 주는 거예요?”

“쉬고 싶어. 정말 지쳤어.”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고 싶어. 이렇게 좋은 병실 말고 좁아터진 내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어. 이번에는 꼭 이삿짐을 전부 풀 거야.”

“일주일만 버텨요. 그다음에 내가 데리고 갈게요.”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젠 절대 혼자 안 둬요. 절대.”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거칠어진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는 게 느껴졌다.

물을 뺀 저수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여러 구 나왔다. 강희건은 시신이 떠오르지 않도록 3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서핑 보드에 시신을 매달아 버렸다. 김재화의 오두막에서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서핑 보드 2개가 발견되었다. 시신 발굴에는 무원만 참여했다. 무원은 이 장면을 희주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주는 휴직을 신청하고 본격적으로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주웅과의 관계는 끝이 났다. 하지만 주웅은 업무상 재해에 가까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희주를 담당할 새로운 전문의를 추천해 주었다. 그는 여전히 정희주라는 인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애초에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에서 시작한 자신의 잘못이라고도 했다. 희주는 성숙한 이 남자를 버리고 무원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똑같은 결말을 또다시 자초하는 게 아닐지 걱정됐다. 파트너와 남녀관계로 엮이는 것은 너무나 고리타분했다. 극적인 감정 때문에 충동적으로 결정했을 거라는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무원은 괜찮을 거라고 너무 쉽게 대답했다. 분명 괜찮을 거라고, 설령 똑같은 결말을 보게 되더라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이 고리타분한 관계에 자신은 진심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세하의 정신 감정을 위한 상담은 매주 금요일에 이루어졌다.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리 상담가는 판에 박힌 질문을 던졌다. 세하는 대부분의 시간에 침묵을 지켰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불행한 유년 시절 때문에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는 여의사 프레임이었다. 그가 무슨 결론을 내리던 관심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할 테니까. 그에 비하면, 세하는 전부 보았다. 인간의 가장 악한 부분과 가장 연약한 부분 모두.

담당 교도관은 상담을 마친 세하를 독방이 아니라 면회실로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재화가 눈앞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김재화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들어 미동도 하지 않는 세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3개월 만인가요?”

세하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릴 적 좋아하던 먼 친척 아저씨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에게 떨어져서 지켜보던 교도관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잘 지내고 있니?”

“조용하고 편해요. 가끔씩 정원을 걷기도 하는데 들고양이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몇 번 손을 뻗어 보았는데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김재화는 목을 살짝 움츠렸다. 세하의 대답은 안타까울 정도로 움푹 볼이 팬 그녀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며칠 전에 꿈을 꿨어요. 난 오두막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아저씨는 내가 나가지 못하게 내 팔을 잡았어요. 꿈이었는데도 팔이 아프더군요. 난 눈으로 엄마를 찾고 있었어요. 분명 저 밖에 있어야 하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어요. 계속 엄마를 찾았어요. 소리를 내서 부르고 싶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죠.”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었다. 온갖 들꽃이 잘 다듬어진 정원을 수놓았다. 꽃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였다. 오치상과 조정배는 윙윙대는 벌과 팔랑이는 흰 나비들 속에서 이은애를 저수지에 처박았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오두막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어요. 하얀 나비는 엄마가 일할 때 매던 앞치마에 달린 레이스 같았어요. 하늘이 비칠 정도로 아주 얇은 날개였죠. 난 엄마를 찾으려던 걸 잊고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어요. 아저씨도 내 팔을 놔 줬죠. 난 나비를 보면서 알았어요. 엄마가 죽었다는 걸. 이 나비는 엄마가 보낸 거라는 걸.”

“네 엄마는 나비처럼 예뻤어.”

“맞아요.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20년이 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해.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청소를 할 때면 난 가끔 넋을 놓은 채 네 엄마를 보곤 했다. 내 더러운 손으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 같았지.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난….”

“아저씨. 왜 돌아왔어요?”

“난 떠날 수 없었다.”

김재화는 그날 강희건의 머리를 골프채로 갈긴 다음, 즉시 컨테이너 창고로 향했다. 품속에는 비행기 표가 있었다. 그는 비행기표를 밤새도록 노려보다가 찢어 버렸다.

“널 두고 떠날 수 없었어.”

김재화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네 부친은 죽었다. 밀린 입원비를 치르고 병원에서 쓰던 물건은 네가 살던 집에 가져다 두었다.”

“거긴 내 집이 아니에요.”

“이제 그만 화내라. 이제 다 끝났잖니. 이제는 다른 생각 말고 너 자신만 생각해라.”

김재화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낡은 철제 의자가 바닥에 끌리면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났다.

“다시 오마.”

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없다. 어쩌면 아저씨를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직감.

“하나만 더 물을게요.”

김재화는 문득 깨달았다. 세하와 이은애가 정말 많이 닮았다는 것을. 김재화는 죽기 직전 자신과 자신의 딸을 응시하던 이은애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때 이인애는 자신을 바라보는 김재화에게 이쪽을 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혹시라도 강희건의 관심이 딸에게 갈까 봐 그녀는 두려워했다. 김재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세하의 눈을 가린 채 돌아섰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포기해 버린, 한 사람의 영혼과 영혼을 지켜 주던 빛이 빠져나가기 직전의 눈빛. 김재화는 지금 세하의 눈빛이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뭘 말이냐.”

“왜 날 버리지 않았죠? 죄책감 때문인가요?”

김재화는 고개를 저었다.

“주희야, 넌 더 행복해도 되는 아이야. 지금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 모든 걸 잊길 바란다. 그저 없던 일이라 생각하고 살아 주면 안 되겠니. 모든 걸 잊되, 네가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건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제발 살아다오. 김재화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돌아섰다. 아마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역시 최준석과 강희건처럼 손에 피를 묻힌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교도관이 면회를 마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전 새로 이전한 구치소는 흡사 도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연상케 했다. 주황색이 섞인 건물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업무용 사무공간이 밀집한 빌딩으로 오해할 만했다. 아마도 철조망이나 감시탑 같은 구치소에 어울리는 뭔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만 800개가 넘는 감시 카메라가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으며, 층간 내부 이동은 엘리베이터로만 가능하다. 형사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자주 온 곳이지만 이번에는 좀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세하는 번번이 희주의 면회 요청을 거부했다. 원칙적으로 수감자는 경찰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지만, 세하는 정신 감정을 받고 있는 수감자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담당의의 판단에 따라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담당의도 면회를 허가했다.

“왜 마음을 바꿨는지 물어봐도 될까?”

희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어차피 두 여자 모두 의미 없는 안부 묻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외눈박이 고양이 기억해요?”

“물론 기억해.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세하는 희주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희주는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절대 질문을 잊지 않을 거라는 것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할 거라는 것을.

“그 아이에게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삽입했다는 말 기억해요? 그 작디작은 두개골을 열고 칩을 심었죠. 아주 까다로운 수술이었지만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거든요. 가족들 곁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은 평온한 고양이의 기억이었죠.”

희주는 세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챘다. 그녀는 강희건에게 저지른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비교적 행복하게 지냈어요.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죠. 천진난만하게 나를 따르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럼 강희건에게는?”

세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옥을, 선물했죠.”

마치 어린이날이라 로봇을 선물했다고 말하는 듯한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형사님 가슴속에 있던 지옥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전히 잘 타오르고 있겠죠?”

“그걸 묻기 위해 날 만나겠다고 한 거야?”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심은 잘 있나요? 설마 벌써 내다 버린 건 아니죠?”

“그 일은 내 머릿속에 잘 있어. 억지로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군요. 형사님이 증오하는 그 남자에게 내가 강희건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옥을 선물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필요 없어.”

“왜죠?”

“그 남자는 언젠가 자신만의 지옥을 맛볼 테니까. 난 믿어. 그러니 너도 지켜봐.”

희주의 대답에 세하는 빙긋 웃으며 이번에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친구 사이에 그 정도 일은 해 줄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그건 내 방식이 아니야.”

“악은 도처에 깔려 있어요. 덤불 속 잡초처럼 무성하죠. 우리가 전부 손볼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치죠.”

“그래도 내 분노 때문에 날 망가뜨리지 않을 거야. 그래서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도처에 깔린 악을 잡아들일 수 없어. 난 내가 할 일이 뭔지 알아.”

“…난 늘 궁금했어요. 엄마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엄마가 나약했기 때문일까요?”

땅속에 묻힌 기분. 산 채로 매장이 되어 이미 무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 죽어서도 땅속에 묻히지 못한 가련한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혼미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의학 서적 어느 곳에도 유년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잊는 방법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았다. 세하는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무덤에서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싶었다.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유를 피해자에게서 찾아서는 안 돼. 애초에 상대방이 나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들이 악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 피해자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들이 악하기 때문이야. 그걸 잊지 마. 그리고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널 증오하지마. 애초에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더 빨리 너와 엄마를 구하지 못한 우리들 잘못이야.”

세하는 잠시 침묵했다. 희주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자신의 좋은 두뇌에 희주의 말에 제대로 스며들길 원했다.

한때는 엄마를 원망했다. 왜 주방에 즐비한 그 많은 칼과 가위로 강희건을 찌르지 못했는지, 왜 아내를 멸시하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건 그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엄마의 희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인생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죽기 직전까지 쥐고 있던 엄마가 틀린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훨씬 낫네요.”

세하는 자신을 돌아보던 엄마를 떠올렸다.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고 엄마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땐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째서 엄마가 자신을 외면했는지.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기억을 지우지도 복수하지도 않을 거야. 계속 현장에서 싸울 거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작고 약한 존재들을 단 한 명이라도 지킬 거야. 그게 내가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유야. 난 피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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