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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기
By 서딘 . Jun 06. 2017

더러워도 결벽함

결벽을 숨기는 결벽이었는지도

머리카락이 촉촉하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다. 씻기를 마치자마자 하수구쪽에 모인 머리카락을 휴지로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습관인데, 독립을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랬다. 향초와 라이터를 가져온다. 양키캔들 퓨어래디언스. 우드 심지 향초이다. 초가 탈 때 타닥타닥 자작나무 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구입했다. 기대만큼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간간히 톡, 톡, 하고 타들어갈 뿐. 독립하면서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아직 스스로에게 할 선물은 많이 남아있다. 청소기, 책상, 의자......


초를 켜고 방 가운데 잠시 앉아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빈둥대다가, 저녁이 지나서야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정리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자 밥이 먹고 싶었고, 운동을 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앓아온 무기력증이 사실은 정리되지 않은 환경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은 당연히 정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정리를 하지 않고 나머지 시간도 제대로 살지 않기를 택해왔다. 핸드폰이 울린다. P였다. 그는 자신의 의지박약을 토로하며 말했다. [너는 참 거침없이 산다.] 방금 스스로를 장기 무기력증 환자라고 쓰고 있었건만.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는 걸까.


방이 아주 더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왜인지 Y는 그런 나에게 선뜻 자신이 방을 청소해주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니다. 이건 내 기억의 왜곡이다. 당시 Y는 나에게 잘못을 했고 (뭔지 기억도 안난다 딱히 잘못도 아니었는데 내가 트집을 잡았을 것이다), 이때다 싶어 내 방을 청소해주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었다. 그날 Y는 내 방에 쌓인 옷더미 속에서 책과, 술병과, 닭뼈를 발견했노라고 진술했다. 나는 Y와 십년 넘게 지내오면서 한번도 Y가 큰소리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 심성 고운 Y가 청소를 하다가 울컥했는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만큼 방이 더러웠는데도 친구들은 내가 결벽증이라고 했다.

"무슨 소리야, 내 방 엄청 더럽거든."

-그건 방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너 한 번 치우면 엄청 엄청 깨끗하게 치우잖아.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 완벽주의자는 일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시작하지 않거나, 아예 망치기를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친구들의 발언도 그런 맥락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몇 년 전부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독려해 온 덕분인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잘하든 못하든 일단 시도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우지 못한 강렬한 결벽을 느낀다. 바로 언어에 관한 결벽이다. 일단 말을 잘 안한다. 다른 실수는 괜찮은데 말실수만큼은 괜찮지가 않다. 아무리 괜찮다고 생각해도 잘 안된다. 하고 싶은 말은 삼킨다. 이제는 내가 말을 하고 싶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글도 비슷하다. 잘 안 쓴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다는 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무지 무지 크다는 뜻이다. 언어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가장 심한 결벽은, 바로 남녀사이의 언어에 대한 결벽이다.


얼마 전 K의 발언에 거부감을 느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남녀 간에 오갈 법한 간질간질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오, 제발. 그런 건 말로 하지 말란 말이야.'

마음 속에서 K에 대한 호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철벽까지 치고 있었다. 아...왜 그런 걸 말로 해서....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도대체 뭘로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남녀 사이의 언어(사랑의 언어라고 쓰면 될 것을 차마 그렇게 쓰지 못한다)는 매우 당연히 필요하고, 심지어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문학으로 역사로 길이길이 남지 않는가. 나는 어째서 그 언어를 수용하지 못하는걸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오해하는 것이 더 편했던걸까.


K와는 연락이 끊어지는 수순을 밟았다. K가 없어지고 나서 알았다. 우리는 언어로 무언가를 확인해야 했다는 것을. 사실 여전히 이 부분이 괴롭다. 그의 언어가 적절하지 않았던 건지, 내가 결벽이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방은 더러우면서 속은 결벽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세상 살기가 어려울까. 나는 잠시 자기연민에 빠질 뻔 했다. 결벽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결벽을 아예 드러내버리는 거다. 그래서 방을 미친 듯이 치우고 있다. 방금 치웠다가 또 치운다. 밥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창문을 가릴 천의 크기를 정확히 재며, 책상과 의자 간 높낮이의 황금률을 미친 듯이 따져본다. 할 수 있는 한 결벽이란 결벽은 다 부린다. 그 과정을 거쳐서 가장 심한, 언어에 관한 결벽에 도달했다. 이때까지는 이런 줄도 몰랐으니까. 이제 아무 말이나 하고 아무 글이나 쓸 때가 왔다. 남자랑 간질간질한 말들을 잔뜩 늘어놓다보면, 뭐가 문제인지 감이 올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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