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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Mar 12. 2023

내가 사랑한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을 뒤늦게 기념하며

1.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도 좋았을 - 비이 (프린세스)


심플스텝스의 ‘세계 여성의 날’ 이벤트로 ‘우리가 사랑한 여성들’ 커피챗과 이벤트를 기획하게 된 건 지극히 개인적인 계기였습니다. 꼬꼬마 시절 만화책으로 즐겨보던 순정만화 ‘프린세스’가 몇 년 전 네이버 웹툰에 이어 이번에는 카카오 웹툰에서 재연재되는 걸 보았거든요. 그렇게 청순가련한 비이를 세 번 만났습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입니다.


프린세스는 라미라, 스가르드, 아나토리아라는 세 나라의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3대에 걸친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입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던 유모의 딸 비이가 왕자인 비욘과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을 하면서 라미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혼란한 정세 속에서 비이가 도망쳐 낳은 프리가 라미라로 돌아가 나라를 되찾는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싶을 때 10여 년 만에 재개됐던 연재가 또 중단되면서 아쉽게 멈췄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 카카오 웹툰으로 옮겨온 것을 보고 다시 볼까 했는데 몇 화를 넘기다 보니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아직 프린세스가 등장하기도 전인 1,2부에 청순가련한 비이가 비욘과의 사랑 때문에 한탄하고 눈물 흘리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입니다. 심지어 이 슬픈 사랑은 2대에 걸친 슬픈 이야기입니다. 비이의 엄마이자 비욘의 유모 에이레네 역시 비욘의 아버지인 표르도바 왕을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거든요. 파라 왕비의 부탁으로 왕자의 유모가 되어 궁으로 돌아오고 친딸인 비이보다 사랑했던 남자의 외아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우는 에이레네를 보면서도 속이 터지더라고요. 사랑이 뭐길래 대체 왜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과 자식까지 희생해 가면서 그렇게 순애보를  바치니! 왜! 왜!


분명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에 가슴 설렜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계속 비욘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한숨짓는 비이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등짝을 몇 대 치면서 “남자가 다가 아니야! 아니라고! 엄마를 보면서도 배우지 못했어?”라고 윽박질러야 될 것 같더라고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로 유명한 들장미 캔디는 씩씩한 맛이라도 있지, 비이나 에이레네는 영 못 쓰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물론 이 만화에도 비욘의 정혼자가 될 뻔했던 에스힐드처럼 강하고 총명한 여성도 나오지만 이쪽도 박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사랑이 밥 먹여주니.”라고 혀를 차는 제가 현실에 너무 찌들어 버린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더 씩씩하고 당찬 여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다뤄지는 이야기를 더 많이 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해리 포터의 허마이어니(헤르미온느)가 등장하고나서부터 여자 아이들이 더 발표를 잘하고 잘난 척도 마음 놓고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본 적이 있거든요.


2. 내가 사랑하는 우리 당찬 루시 Lucy (Peanuts)

그렇다면 누구를 좋아하냐고요? 스누피로 유명한 찰스 슐츠의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루시가 참 좋습니다. 친구인 찰리 브라운과 동생인 라이너스를 괴롭히는 자타공인 심술궂은 빌런이지만,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루시를 보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5센트짜리 심리 상담소 부스를 자주 여는 루시가 가끔은 궤변 같으면서도 날카로운 상담을 해주는 것도 눈에 띕니다. 그런 루시를 가장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네 컷 만화를 봤을 때예요.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차별에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루시도 이 운동에 동참한다고 페퍼민트 패티가 찰리브라운에게 얘기해요. 마지막 장면에서 루시가 “SPEAK OUT! ”이라고 소리치고 찰리 브라운은 그 기세에 놀라 넘어지고요. (산타로사에 있는 찰스 슐츠 박물관을 갔을 때 이 마지막 장면을 배지로 만든 게 있어서 냉큼 사 왔답니다.)


가끔 안갯속을 헤매며 길을 잃은 것만 같을 때, 자꾸 쪼그라드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확신에 가득 찬 루시를 보면서 스스로 되뇌곤 합니다. 사실은 너도 뭘 원하는지 알고 있지 않냐고. 너를 먼저 생각해도 괜찮다고. 당당해지자고. 할 말은 하자고.


3.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 사랑할 나의 빨강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저는 ‘빨강머리 앤’을 사랑합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시리즈 Anne of Green Gables 8권은 물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1985년 버전 드라마 Anne of Green Gables,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Anne with an E 모두 다 본 광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했던 건 애니메이션이에요.


‘아기공룡 둘리’에서 객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고길동이 불쌍해질 때 어른이 된 거라고 하죠. 얼마 전, 저는 그 마음을 앤이 아닌 마릴라에게 공감하며 느꼈어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앤이 여전히 귀여우면서도 “앤, 저기... 아주 잠깐만, 잠깐만 좀 조용히 하지 않을래?”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마릴라의 고충을 육아를 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거겠죠.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 같은 초긍정의 말들을 한 치 의심도 없이 소프라노 솔 톤으로 재잘재잘 말하던 앤도 자라면서 차분해집니다. 기쁨과 환희의 길, 절망의 구렁텅이... 앤이 즐겨 쓰던 표현을 어른이 된 지금은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쓰지 않는다는 성장한 앤에게 마릴라가  낭만을 너무 버리지 말고 조금은 남겨두라고 말할 때 다시 눈물이 핑 돕니다. 무뚝뚝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을지는 모를지언정, 아낌없이 사랑만 퍼부어준 매튜 아저씨만큼, 아니 어쩌면 주양육자로서 마릴라는 악역을 자처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앤을 사랑했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되니까요.


그렇게 마릴라처럼 어린 딸이 조금만 조용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남몰래 간직하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도 저는 여전히 빨강머리 앤의 명대사를 몇 개나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마릴라처럼  제가 남겨놓은 낭만은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라는 앤의 다짐 같은 거요. 그 가장 좋은 것도 사실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에요.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라는 앤의 말처럼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을 만들어 나가기를 조용히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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