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서울대 타이틀보다 더 무거운 단어를 찾는 중입니다

by 김재훈
그럼 대표님도 서울대 나오시지 그랬어요.
그럼 우리가 대표님 원하는 금액만큼 투자해 줬을 텐데요.

몇 해 전, 투자 유치를 위해 만난 한 투자사 관계자가 내게 던진 말이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진심이었고, 나는 그 말이 주는 묘한 무게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서울대 출신은 일종의 보증수표처럼 통한다. 투자사, 언론, 정부 과제 어디서든 “서울대 출신 창업팀”이라는 한 줄은 신뢰와 가능성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실제로 벤처캐피털협회의 2023년 보고서를 보면, 초기 단계 투자금의 약 30% 이상이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출신 창업자에게 집중된다고 한다. 특히 서울대 출신이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서울대 출신은 아이템만 가지고도 10억은 받는다.” 당연히 과장된 말이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아이디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사업 모델이 다소 미완성이어도, 서울대라는 이름 하나로 미팅의 문이 열리고 신뢰가 따라붙는다.


몇 해 전 나의 회사도 투자를 받기 위해 여러 투자사를 찾아다녔다. 그중 한 곳에서 나는 서울대 편중 현상에 대한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력과 실행력이지, 출신 학교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 투자사 관계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대표님도 서울대 나오시지 그랬어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렸다. “유튜브, 페이팔, 오라클… 심지어 전 세계 남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플레이보이를 만든 사람도 우리 학교 출신이에요. 그리고 우리 학교 월드랭킹은 서울대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미팅은 거기서 끝이 났고, 우리는 결국 투자를 받지 못했다.


물론 냉정히 말하면, 투자사가 우리 회사의 기술이나 시장성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가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투자받기 어렵다”는 말이 우스갯소리 같았지만, 그 말이 실제로 현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걸 보니 씁쓸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투자는 결국 신뢰의 문제이고, 서울대라는 타이틀은 한국 사회에서 ‘검증된 엘리트’의 상징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능한 한 확실한 사람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너무 당연하게 들려서 마음이 무거웠을 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러나 회사를 키워가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버텨내고, 다시 일어서면서 확신하게 됐다. 진짜 신뢰는 학교 이름이 아니라 결과에서 나온다는 것을. 투자자는 결국 숫자 앞에서 움직이고, 나의 숫자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이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저희 회사 이름으로 기억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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