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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표 쓴 이선생 Apr 08. 2024

프롤로그

<졸업생들에게 쓰는 편지> 프롤로그

이 글의 출발점은 졸업식에서 제자들이 건넨 편지를 읽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2023년 1월 10일, 3년을 가르쳤던 아이들과 작별하는 , 학교 체육관에 입장하는 졸업생들의 기대에 찬 표정과는 달리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불참자 명단을 확정하고 나니 행사 후에 졸업 앨범만 전달하면 해야 할 일은 다 끝나는 것이었음에도 무언가 빠트린 일은 없는지 머릿속 체크리스트를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해했다. '졸업식마다 이랬지.'라고 스스로를 두둔하고 있는 동안, 식이 시작되었다. 한 명씩 이름이 불리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내 순서가 어긋나진 않았는지, 이름이 잘못 기재되진 않았는지 따위를 신경 쓰느라 그관찰할 겨를이 없었다. 졸업장을 받아 든 아이들은 분명 각기 다른 이유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있었을 텐데 나는 사소하고 좀스러운 생각 사로잡혀 3년이나 가르친 제자들의 뜻깊은 순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별 탈 없이 행사는 끝이 났고, 졸업생 여럿이 인사차 찾아왔다. 사진 찍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선 사진 요청 정도는 흔쾌히 들어주어야 했다. 겉으로는 여유 있게 아이들의 졸업을 축하해 주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와 같은 '어른다운' 덕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 불안하고 분주한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교무실, 익숙한 의자앉아 졸업식장의 열기가 남기고 간 피로감을 잠시 누그러뜨린 후 아이들이 준 수십 장의 편지와 카드를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졸업식 내내 지난 3년의 세월보다 졸업식이 끝날 시간만을 떠 올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2020년 6월이었다.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이 실시된 해였다.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았던 3월이 무심하게 지나가고 4월 16일에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가정과 학교를 연결해 준 건 '클래스룸'이라는 미지의 플랫폼이었다. 실시간 수업과 출결 확인, 과제 제출 등 모니터 안으로 옮겨진 교실에 적응해야 했던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없는 학교는 마치 우주 속 어딘가에 남겨 듯 낯선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내가 실재하는 존재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맞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캠을 꺼 놓더라도 목소리로 아이들을 확인할  있었지만,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가르쳐왔던 교사로서의 시각적 관성이 쉽게 변할 리 없었다. 수업 중인 텅  교실이 묘하게 모순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탓에 그들의 실체에 관한 일말의 의심은 쉽사리 거두어지지 않았다. 결국 6월 첫 주에 1학년 등교가 결정되었고, 학생들이 학교로 걸어 들어오는 광경목격하고 나서야 그들이 더 이상 가상 세계나 외계의 존재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막 졸업한 17살의 풋풋함이 가상현실의 장막을 뚫고 전해져 왔다.


이렇게 시작된 나와 그들의 3년은 다사다난했다. 지방의 작은 외국어고등학교발령받아 학년 부장 역할을 3년 동안 수행했다. 가르치기 위한 아이디어와 열정이 넘쳐흐르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교육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낸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하여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그 흔한 독서프로그램조차 운영되지 않던 학교에 독서와 글쓰기 프로그램을 학년 연계형으로 도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글을 한국어와 영어로 읽고 쓰게 했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코로나19로 국내 수학여행조차 못 가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담임선생님들과 협력하여 핼러윈 코스튬 파티를 기획하고 밤 11시까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외부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기에 대학생들과 강사들을 섭외해 학교 안에서 사회적 만남의 기회를 마련하였고, 교내 아나바다 장터(Charity Shop)운영하여 얻은 수익금을 복지법인에 기부하기도 했다. 3학년이 되어서는 11월까지 전쟁과도 같았던 입시 현장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번아웃이 찾아왔다. 2022년 3월쯤에는 처음으로 사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여러 요인이 뒤섞여 발생한 문제였기에 원인을 찾아 고쳐보려는 노력은 헛수고일 때가 많았다.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이니 어쨌든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1년간 자기부정시간은 계속되었고 어떻게든 견뎌내면서 3년을 가르친 제자들을 졸업시켰다. 2023년에도 3학년 부장을 1년 더 맡아 간신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올해, 교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의원면직, 즉 사표를 쓰자고 마음먹었을 때 든 첫 번째 감정은 후련함이었다. 15년간 나름 치열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준비해 오면서 많은 걸 배웠고 경험했다.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고,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거란 벽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계에 직면하고 나니 도리어 갑갑했던 속이 풀리면서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문구도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쳐 주진 않더라도 나 혼자 박수 치며 떠날 수 있겠단 만족감이 용기를 주었다. 동시에  인생 유일한 기회가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체적 선택을 해 본 적이 있는가에 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을 제외하면 다른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부양가족이 있는 40대 중반 남성이 주변 대다수가 말리는 선택을 실행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의문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의 시간을 보낸 후, 나의 감정과 이성 모두가 동의해 주었고, 아내 또한 지지해 주었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했다.


후련함과 만족감과 주체성으로부터 발현된 선택이기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 단 한 가지 남은 미련은 2020년에 처음 만나 2023년에 졸업한 이 아이들과의 교육 동행이 아무 기록 없이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 값진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깐깐하고 엄했던 나의 교육방식과 높은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했던 교육활동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아이들이었다. 동시에, 15년간 가르쳐 온 학생들 중 가장 기대 이상의 성장을 보여준 고마운 아이들이었다. 졸업식날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편지 속엔 몰라보게 성숙해진 추억이 서려 있었다. 정성이 담긴 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나도 펜을 잡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이 닳아 없어지기 전 어딘가에 기록하여 마지막 남은 미련을 해소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직업상의 필요에 의해 글을 쓰곤 했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을 쓰려하니 설렘이란 생소한 감정이 들어 반갑기도 하다.


이제부터 아이들의 편지를 하나씩 꺼내보며 답장을 써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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