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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May 18. 2015

감사는 마음의 기억이다.

감사는 숨어서 일하시는 신을 볼 수 있는 시력이다

감사는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풍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다.


간혹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이 TV에 출연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일부 뇌 과학자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러한 천재성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뇌가 ‘기억’하는 능력과 아울러 ‘망각’하는 능력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능가하는 인간의 놀라운 [기억능력]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감사의 기억이다.


감사는 인간이 기억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픈 기억을 넘어 오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며, 아울러 미래를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열어준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생각’과 ‘묵상’이라는 뇌의 기능과 복합적인 상호 관계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다. 이 3개의 동사들은 시제와 단어의 활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의미론적으로 분석한다면 영어에서 기억이라는 단어 remember는 고대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지만 원래는 후기 라틴어 rememorari ( re- 다시 + memer 마음에 두다 + -ari )가 어원이다. 뜻 그대로 다시 마음에 두는 것이 기억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억하다’라는 말은 어떤 정보를 머리 속에 입력하다(memorize)나 정보를 끄집어 내다(recall)라는 단어로 입력과 출력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기억의 의미는 입력 보다는 출력의 의미로 주로 묵상에 가까운 부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앞서 적었듯이 최근에 기억에 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 중에 하나는 사람이 기억 못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라고 한다. 뇌과학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는 죽는 날까지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능력은 아주 손쉽게 가질 수 있다. 바로 기억하려고 애쓰면 된다.


그러나 기억하는 일은 번거롭고 귀찮고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 현대인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정보를 입력하는 기억보다 정보를 출력하는 기억 기능이 현대인에게 있어서 서서히 퇴화하고 있다. 우리에게 묵상이라는 기억의 방법은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훈련되지 않는 분야이다.


뇌와 기억에 관한 학설들은 연금술처럼 매혹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현재 인간의 과학적 도구와 지식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분야이다. 실제로 아직까지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는 인체의 성역이 바로 두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뇌의 신비함에 감추어져 있는 기억의 구조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서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또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마저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덮어 버린다.


그러나 많은 이론 중에서도 우리가 이해와 설득을 쉽게 할 수 있는 이론은 ‘작업기억’이라고 불리는 운용기억과 영구기억의 구조이론이다. 이 구조이론을 디지털화시키는 것이 바로 컴퓨터의 기억 구조이다.

사람의 운용기억은 정보를 20초 정도 담고 있다가 이것을 영구기억으로 넘겨 버리고 영구기억은 받은 정보를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의식 수준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저장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운용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보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보가 종합되고 쓰일 수 있는 정보로 변환되는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영구기억의 용량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무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수학자인 John Girffith는 사람은 일생을 통하여 대영백과사전에 나오는 정보의 500 배나 되는 정보를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일 때, 정보를 기억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기억(입력)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를 영구기억에 저장하고 의식세계에서 항상 기억하려면 운 용기억에서 많은 리허설(rehearsal : 계속 반복하여 정보를 생 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단 영구기억에 저장된 정보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회상(回想 : Recall)과 재인(再認 : Recognition)의 방법을 쓰게 된다. 회상은 이미 습득한 정보를 그대로  인출하는 방법으로 이것은 주관식 문제를 풀 때 많이 사용된다. 재인은 객관식 문제를 풀 때 쓰는 방법으로 주어진 정보가 기억 속에 있는지 확인을 하는 방법이다.


영구기억의 용량이 거의 무한하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공통의견인데 왜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망각이라는 것이 기억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을 방해하는 기능이 아니라 기억을 돕는 기능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잊어버리는 것, 곧 망각이라는 것은 기억만큼 중요하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불행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이런 망각에 대해서 두 개의 상충된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쇠퇴이론이고 또 하나는 방해이론이다.


쇠퇴이론은 정보가 사용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이고, 방해이론은 다른 정보의 영향으로 인해서 쉽게 인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실험적, 임상적 증거들이 쇠퇴이론 보다는 방해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정보가 기억 구조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망각이란 없으며 다만 다른 정보의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정보의 인출이 방해되고 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책을 읽어도 그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운용기억의 리허설이 없거나 많은 양의 정보가 인출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사람이 매우 심각한 자세로 기억의 위기에 관해서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우리에게 밀려 오고 있다. 한 예로 타임즈 잡지가 주는 정보량은 중세시대 농부가 평생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라고 한다.


또한 현대인은 하루에 평균 600개가 넘는 광고를 보게 되고, 눈을 뜨는 아침부터 자는 저녁까지 수많은 매체를 통해서 엄청난 정보를 머리에 쑤셔 넣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리고 살아가는 기쁨이라고 생각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 마음은 원치도 않은 정보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항상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감사는 기억의 포맷이라고 할 수 있는 망각이 작동하지 않게 한다.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감사로 기억하는 것들은 매우 오래 기억되어진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한다면 생생하게 사건과 감정을 그대로 보관하는 일종의 냉장보관 타임캡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감사를 하면 행복한 호르몬이 분비되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엔도르핀이 나온다는 것이 더 이상 신기 한 뉴스가 아니다. 하지만 감사가 기억력을 좋게 한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누구나 경험을 통 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감사는 특정 사건에 대해서 기계식 암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함이라는 독특한 감정을 형성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감정을 보존해준다. 그래서 감사를 마음의  기억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잊혀진 것을 기억해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하지만 열처리가 잘못된 용광로에 공기방울이 들어가 순도가 떨어진 강철을 만드는 것처럼 기억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기억의 순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억하면서 분노하거나, 기억하면서 짜증이 나거나, 기억하면서 마음 이 힘들어지거나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기억의 대부분은 힘든 일들이 많다. 하지만 감사라는 필터를 활용해서 기억해내면 걸러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서 기억된다. 힘든 일이었지만 감사를 통해서 기억하면 관점이 바뀌고,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그때는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가치와 기회를 보게 된다. 특히 감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진실에 대해서 바라 볼 수 있게 한다.


나도 기억하기 싫은 힘든 과거가 있다. 이혼한 가정에서 사는 것은 드라마 이상의 아픔이 있다. 그래서 나는 TV 작가들이 재미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혼을 갈등의 소재로 삼는데 대해서 무조건적 반감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결혼을 하기 전에 아이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의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이제 결혼을 하고, 나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더 자주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은 예전에 다친 상처의 딱지를 뜯는 아픔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감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아픔이 없었다면 나는 아이들의 소중함을 몰랐을 것이고, 이런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감사라는 렌즈를 사용하니 남 들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행복하게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과거 뒤의 미래를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아픈 기억에 대해서 감사는 치유가 아니라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감사는 자신이 살아온 고단한 인생에 대해서 ‘직역’하지 않고,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의역’ 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은 마음에 묻지 말고 오히려 꺼내어 감사로 태워버려야 한다. 과거의 슬픈 기억을 혼자 몰래 훔쳐 보지 말고 오히려 감사로 슬픈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는 감사를 통해 오늘의 행복의 이유로 만들어야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감사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는 뇌 과학이 풀지 못하는 영원한 신비주의자들의 비밀이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감사는 사람을 용서하는 신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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