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태어나기 전이겠구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전 사회적으로 자살률이 너무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어. 전체 인구 중 둘에 하나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면서 인구가 크게 축소되던, 이른바 인구 붕괴 시기 말이야. 이미 적절한 대응 시기를 놓친 국가에서는 더 이상의 인구 붕괴를 막기 위해 초강수를 뒀지. 자살이 범죄가 되고, 국가가 시민들에게 약물 치료와 로봇 감시제를 도입한 거야.”
김 박사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많은 시민이 인권을 외치며 반대 시위를 했는데, 국가에선 로봇을 앞세워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어. 들으니 그 청년도 자신의 두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었다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울었지.”
“들었던 기억이 나요. 이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래. 그런데 그 청년에게 괴로운 기억과 감정을 없애려면, 그 기억과 연결된 소중한 기억도 함께 잃을 수 있다고 말해줬더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정을 못 내린 채 그저 울고만 있더구나. 너무나 어리석지?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야. 그래서 나는 그를 설득했지.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느니, 너 하나라도 잘 사는 게 낫다고.”
“감정 조작을 하면, 연관된 기억도 잃어버리나요?”
“그래. 그래서 결국 감정 조작을 하러 왔다가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아! 자신이 극복하지도 못할 거면서, 결국 약물 교화 대상이 되지. 너도 알지? 약물 교화 대상의 끝이 어디인지. 자기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채 약물중독의 길로 빠져버리는 거라고! 내가 살려준다고 할 때 살아야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말이야.”
김박사는 흥분한 나머지 말을 이어가며, 들고 있던 문서를 소년에게 건네려고 손을 뻗었다. 문서를 받아 들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놀라움에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뭐죠?”
소년이 놀란 목소리로 박사에게 물었다.
흥분해서 손짓을 하며 일장연설을 하던 박사의 손목에서 옷깃이 걷혀 있었고, 손목을 감싸던 거즈가 반쯤 벗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아래로 아직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들이, 이미 아문 흉터 위로 여러 겹 겹쳐져 있었다.
박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서 옷소매 속으로 감추고, 곧바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는 바닥 위로 떨어져 굴렀다.
“무슨 짓이야, 너!”
박사는 분노에 휩싸여 고함쳤다.
“아니, 제가 일부러 본 게 아니라… 우연히 보여서… 저도 너무 놀라서요. 다치신 줄 알고…”
“버릇없는 녀석! 나는 너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순전히 좋은 마음으로 도우려 했던 건데… 왜 선을 넘는 거야! 너 이 자식… 너 뭐야!”
김박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을 쏟아냈다. 소년은 무서움에 몸을 웅크린 채 의자에 움츠러앉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박사의 고함 소리가 끊겼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박사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한참이 흐른 뒤, 김 박사가 낮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네? 네… 알겠어요.”
“나는 강한 사람이야. 그건 진짜야. 저렇게 자신의 기억도 지우지 못하고, 잊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그저 아주 가끔씩 통증이 필요할 뿐이야. 그냥 그것뿐이야... 나는 비겁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강해서 살아남은 거야. 나는 강해서 사람들을 구제하고 있는 거야!”
말을 끝내고도 한참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김박사는 옷소매를 단정히 매만진 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내가 조작한 사람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을 가진 소년이었어. 분노, 슬픔, 죄책감, 그리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실 나도 압도될 것처럼 두려웠어. 그만큼 큰 감정이었지.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여동생 때문에 고민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열심히 설득했던 기억이 나. 설득 끝에 결국 감정 조작을 할 수 있었지.”
김박사는 다른 시간을 응시하듯이 허공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 여동생을 가끔 찾아서 돌봐주기로도 했거든. 그런데 감정 조작을 한 뒤 그 여동생이 있다는 곳을 찾아갔더니, 보호자의 동의가 없어서 입장할 수가 없더라고. 보호자가 바로 그 오빠였거든.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돌아왔어. 여동생의 보호자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그 청년도 잘 몰랐던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 조작을 이미 시행한 대상자에게 다시 힘든 기억과 감정을 주는 게 맞는 걸까? 나는 그러기 싫어서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어.”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사가 무서워서 무슨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이 사람 좀 찾아가 줄 수 있니? 나는 자신이 없어. 내가 조작 치료를 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내가 잘못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 케이스거든. 어쨌든 거짓말로 그 사람의 인생과 인연을 막은 셈이 된 거니까.”
“직접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소년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나에 대한 분노 과정을 겪지 않고 그가 자신의 삶을 되찾길 바란다. 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그 사람에게 불필요한 허들이 될 것 같아. 그 단계를 뛰어넘고 바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좋을 것 같아.”
“이 사람은 어디에 있죠?”
“응. 조작하고 2년 후 마지막 모니터링을 했을 때 살던 주소가... 여기 있어. ‘미래체육관’이라고 쓰여 있네. 그 남자의 이름은 ‘이솔’이고, 그 남자에게 가서 ‘루아’라는 이름을 말해줘.”
“‘루아’요?”
“응.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이 서류를 보여줘. 워낙 강렬한 기억과 감정들이라 아마 금방 쓰나미처럼 몰려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