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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 미래 체육관

by 송영채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서류를 받아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솔직히 소년은 김유미 박사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년이 김유미 박사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솔’이라는 남자가 떠올랐다는 김박사의 이야기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딘가 닮았다는 그 남자에 대해서 소년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억을 잃고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가 만약 감정과 기억을 지우고 잘 살아가고 있다면, 어쩌면 소년 자신도 감정 조작을 통해 ‘증발’할 수 있지 않을까? X박사를 찾지 않고도 증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소년은 도심에서의 위험한 여정을 조금 더 이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머니 속에 넣은 ‘이솔’의 서류를 만지작 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체육관은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체육관은 1인 가구를 대상으로 집을 배정받는 독자특화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아직 이솔이라는 남자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면, 여전히 그 곳에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체육관은 오래된 건물의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외관만큼이나 낡은 시설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링과 매트,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이름 모를 운동기구와 철제 장비들…. 소년이 가보았던 교육 중심부의 운동센터나 학교 체육시설은 모두 최첨단 장비와 모니터링 기기, 운동 로봇들로 가득했지만, 이 곳엔 오로지 아날로그 시설 뿐이었다.


“누구시죠?”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건장한 남자가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왔다.


소년이 쭈뼛거리며 서 있자, 남자는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운동하러 오셨나요? 여기 체육관에는 이렇게 어린 학생이 온 적이 없어서요.

제가 좀 늦게 나왔죠? 지금은 회원님이 없는 시간이라 운동 좀 하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소년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벽면에는 남자가 근육을 과시하는 듯한 포즈로 찍은 사진들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선반에는 그가 받은 듯한 트로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트로피에는 ‘World Champion’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거요? 이건 재작년에 받은 겁니다. 글로벌 신체 기능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을 받았죠. PHYSION 대회라고 들어보셨나요? 역사가 30년 정도 되는 유서 깊은 대회예요. 인류의 신체적 비전을 제시하는 챔피언을 뽑는 대회인데… 작년에는 준비가 부족해서 순위권에 들지 못했지만, 올해는 다시 열심히 준비해서 재도전해볼 생각입니다.”

남자는 소년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기계가 사람들의 일을 많이 가져갔죠. 물론, 기계를 비난하려는 말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여하튼 사람들의 지능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많지만, 저는 인간의 신체 능력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강하게, 그리고 지능적으로 훈련해서 로봇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게 제 사명입니다. 물론 로봇의 종류는 수없이 많지만, 제가 말하는 건 ‘전투 로봇’입니다.”


남자의 말을 들으며 소년은 놀란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이 남자는,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로봇에게 학살당했던 그날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건 아닐까? 그러나 곧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의 몸이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그릇이지요. 요즘은 마음이 무너져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면 결국 우리의 몸이 희망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운동 전도사로 살고 있죠.”


그제야 소년은 남자가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곤 시선을 천천히 옮기던 소년은 다시 남자의 몸에 시선이 닿았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거대할 수도 있구나 싶게 온 몸의 근육이 크고 우람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남자는 키까지 큰 편이라 그 존재감은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검정색 민소매 티셔츠 아래 드러난 어깨와 팔의 근육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한쪽 허벅지의 굵기는 소년의 것보다 두세 배는 되어 보였다.


“아, 운동하면 금방 이렇게 될 거예요. 우리 회원님, 운동은 처음이시죠?”

남자는 어느새 소년을 ‘회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네…”


소년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차마 ‘루아’라는 이름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세계 챔피언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 그리고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 이런 삶이라면, 굳이 과거의 기억 따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김유미 박사의 부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소년은 남자의 권유에 마지못해 탈의실로 밀려 들어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탈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뒷모습은 처음 소년을 응대하던 활기차던 모습과는 달리, 힘없이 축 처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망설이던 소년이 조금씩 다가가 보아도, 남자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ChatGPT Image 2025년 11월 3일 오후 06_08_08.png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까랑 다르게… 너무 힘이 없어 보여서요.”


“아… 네, 회원님. 제가 가끔 이렇게 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우울한 건 아닌데, 정서 모니터링에서는 늘 문제없이 통과하거든요. 힘든 것도 아닌데,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깊이 가라앉는 것처럼, 갑자기 마음이 짓눌릴 때가 있어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멋쩍은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해서 정말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운동도 못 하고,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요.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럴 땐 정말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작년부터 이런 증상이 가끔 생겼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심해서 운동에 지장을 줄 정도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냥 저도 놀랐던 거예요. 근데 저도 멍할 때가 많아요. 슬픈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멍해져 버리곤 해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아직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네.”


“이렇게 앉아 있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 마음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걸까, 하고요. 아무래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힘들긴 했지만, 한 번은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본 적도 있었어요. 정말 쉽지 않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찾아보니까, 마음 안에서 거대한 그리움의 강이 흐르고 있더라고요. 무엇이 그리운지,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것까진 아직 찾지 못하신 거군요.”

“네.”


남자는 허공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하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예요. 성장기를 거치면서 제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졌거든요. 아마도 그때 사회가 엄청난 혼란기였으니까, 그 난리 속에서 가족을 잃고 고아원에 갔던 것 같아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이 많을 수밖에 없죠. 아마 그래서, 더 운동에 집착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하지만 선생님은 제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한 분 같아요. 저도 그렇게 돼 보고 싶어요. 이런 생각,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소년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년의 고백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 천천히 뿌듯한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화사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저 고백할 게 있어요


바닥을 바라보던 소년이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 사실 어떤 말을 전하러 왔거든요.”


소년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무슨 말이요?”


“아… 저도 잘 아는 분은 아니에요. 어쩌다 만나게 됐는데, 당신께 이름 하나를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머뭇거리며 잠시 숨을 가다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은… 바로… ‘루아’예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무언가 거대한 흐름이 그의 몸을 통과하는 듯했다.


1분쯤 지났을까. 마치 10분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지더니, 남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이내 그의 커다란 몸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괴성과 함께 무릎을 꿇은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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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