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박사님이 루아를 돌보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때 18살이었고, 눈앞에서 부모님을 잃었고, 남은 동생을 위해 살아야 했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동생을 외면하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도 역시,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때 김박사님이 저를 설득해 주셨죠. 자신이 루아를 돌봐 주겠다면서요. ”
감정이 가라앉은 남자는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기억을 잃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마음속엔 언제나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눈물이 가득 차올라 언제라도 울 것 같이 마음이 항상 무겁게 젖어 있었어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지만, 그 무언가가 그리워 견딜 수 없다는 감정, 그것도 정말 힘들었어요.”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미세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잃어버린 기억이 아주아주 괴롭고 힘든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걸 찾고 싶어 견딜 수 없었죠. 사실 감정조작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 느끼리라곤 상상을 못 했어요.”
남자의 말을 들으며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도 과연 지우고 싶은 감정과 기억이 있는지. 막연히 증발을 꿈꿨지만, 딱히 지우고 싶은 단 하나의 기억이나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뿌연 안갯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어떤 기억과 어떤 감정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소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감정 조작을 또 하실 건가요? 기억을 또 지우실 건가요?”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미 기억을 다 잃어보고, 다시 되찾아본 저로서는, 기억을 되찾은 지금이 더 나은 것처럼 느껴져요. 그 기억은 너무 아프고 괴롭지만, 그 안에 부모님의 인자한 미소와 포옹, 그리고 귀여운 동생의 다정한 얼굴이 있어서, 그걸 추억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아마 저는 기억을 또 지우고 싶어 할 것 같아요. 아무리 괴로운 감정과 기억이라도, 그게 절 떠받쳐 줄 거라는 걸 그땐 절대 몰랐을 테니까요.”
소년은 왠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사는 게 아무 의미 없이 느껴져요. 답답하고, 정 붙일 곳도 없죠. 부모님의 따스한 품이나 추억도,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그냥 없어져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증발을 시켜준다는 박사의 주소를 찾았죠. 그 주소를 찾아가다가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만나서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그럼 이제 다시 그 박사를 찾아갈 건가요?”
“네.”
“그런..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요? 저 이제 동생을 만나러 가려는데, 혼자 가는 게 좀 두렵기도 하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제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빨리 찾으러 가야 하긴 하는데…”
얼버무리는 소년에게 남자가 애원했다.
“부탁드려요. 달리 부탁할 사람도 없고… 루아와 제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루아가 14살이었어요.
아까 14살이라고 했지요? 동갑이네요. 루아가 아주 오랫동안 친구가 없었을 거예요. 부탁할게요.”
소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자신의 지난 인생에서 나눈 모든 대화보다 더 깊은 대화가 오간 남자와의 시간에 이끌렸던 것일까. 아니면 동갑이었다는 루아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서일까. 하지만 궁금증보다는, 남자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자연스레 소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루아가 있는 곳은 미래기술부에 위치한 혁신기술센터였다. 루아는 왜 그곳에 있는 걸까? 소년은 궁금했지만, 입을 굳게 닫고 있는 남자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어서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혁신기술센터 로비에서 남자가 자신의 모바일 신분증을 로봇에게 제시했다. 남자와 로봇이 대화하는 모습을 소년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루아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무슨 연구에 참여 중인 걸까? 생각 중엔 소년에게 남자가 돌아와 올라가자고 손짓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는 지하 3층을 누르고 소년에게 말한다.
“우리 루아는 지금 10년, 아니 12년째 14살이네요.”
“네? 12년째요? 어디가 아팠나요?”
“아팠었죠. 아주 많이. 오래전이라 아마 모를 수도 있는데, NOVA-55라는 신종 바이러스였어요. 기후가 변하면서 박쥐의 서식지가 변하고, 그 과정에서 예전에 없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변이 바이러스가 소아에게 침입하면 뇌염을 일으키는 치명적 증상이 발생했는데, 우리 루아도 예외가 아니었죠.”
남자는 초조함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많은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떤 과학자들은 그 바이러스 염색체의 패턴에서 편집된 증거를 찾으면서 인공적으로 합성되어 퍼졌다는 주장을 했고, 그에 힘입어 특정 국가에서 무기로 퍼뜨렸다는 음모론도 돌았지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죠.”
남자가 말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지하 3층에 도착해 있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서 복도를 걸으면서도 계속 이야기했다.
“그때 동생이 오래 아프면서 부모님과 제가 자료도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는데, 1900년대 초반의 스페인 독감이든, 2020년의 코로나 바이러스든, 2055년의 노바 바이러스든, 가장 중요한 예방은 마스크 쓰기였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했어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의학이 발전해도,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건 여전히 별게 없는 것 같고, 바이러스는 늘 우리를 따돌리며 앞서 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도 들었죠.”
남자는 어느덧 금속성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옆에 부착된 인식 센서에 남자의 홍채와 지문을 인식하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방안의 광경을 본 소년은 깜짝 놀랐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14살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방 안에는 차가운 금속 소재의 기계들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병실이 아니었나요?”
“김박사님께 못 들었어요? 우리 루아, 지금 저 안에 있어요.”
어디선가 소년의 키 만한 로봇이 다가와서 말했다.
“김루아의 보호자, 김솔 님 접속을 준비 중입니다. 승인하시려면 지문을 인식해 주세요.”
소년의 머릿속에 폭풍이 치듯이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14살 소녀, 12년 동안 14살이었던 소녀, 루아가 지금 저 기계 안에 있다고?’
소년은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을 자세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직육면체의 검은색 박스들이 벽을 따라 원호처럼 늘어서 있었고, 굵기가 다른 케이블이 뿌리처럼 얽혀 연결되어 있었다. LED는 호흡하듯 들쑥날쑥 점멸했고, 바닥엔 냉각 팬의 저주파가 미세한 떨림으로 퍼지며 마치 주술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앙에는 구릿빛의 거대한 원통이 천장에 매달려있었고, 그 아래로 마치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금속관과 선들이 복잡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수한 케이블 선들은 흐르는 빛들을 원통 속 어둠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계에 바로 루아의 의식이 복제되어 있어요.”
루아가 바이러스성 뇌염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 부모님은 연구센터의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뇌염 증상이 악화되어 의식이 손상되기 전에, 루아의 의식을 기계에 복제하는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권유하는 연락이었다. 물론 처음엔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 아무리 완쾌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생명 유지장치에 의존해서 숨 쉬고 있다고 해도, 그 몸을 저버리고 의식을 복제하고 싶어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느 날 온전한 의식을 회복한 루아가 유언을 하듯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이 몸이 없이도 가족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나 그렇게 해보고 싶어.’ 그 말은 몇 날 며칠 동안 부모님의 마음을 커다란 돌멩이처럼 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루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울던 어느 날, 부모님은 떨리는 손으로 눈물 젖은 연구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