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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29. 2021

연하장

세상의 모든 당신께

진 출처: pixabay




삼가 새해를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무릎을 마주하였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몇 자 적어봅니다. 그날은, 오늘처럼 사람을 불러내는 데 구실이 필요 없는 연말이었습니다. 나는 일찌감치 저녁을 지어먹고 양치까지 마친 다음 하릴없이 방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스케치를 해본 적이 오래 됐지만, 그리라고 한다면 어찌 그려낼 듯도 합니다. 얼굴을 달처럼 올려다보면 마음도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둥실둥실 떠올라 무작정 전화기를 꺼내든 것이었습니다.


  나는 원체 아무 말이나 만들어내는 주변이 기에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이런저런 걱정이 많습니다. 대화가 끊어지면 어찌하나 싶어 머리를 빗고 외투에 손을 꿰는 동안 화제가 될 만한 거리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지하철 기둥을 부여잡고 유행하는 드라마며 영화가 있는지 검색하거나,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람이 마치 당신인 양 속으로 안부 인사를 건네도 봅니다. 


  아니면 읽을 거리로 갖고 나온 아끼는 소설책도 있습니다. 흔들리는 찻간에서는 영 집중을 하지 못해서 옆구리에 낀 참입니다. 책등이 뜨뜻해질 때까지 오래오래 있다가, 겨우겨우 눈치 챈 당신이 조그만 관심이라도 보이 시침을 뚝 떼고, 아 거요? 요새 내가 읽는 건데, 제법 글맛이 있어요. 자아 구 가서 한번 읽어 봐요. 아뇨, 아뇨. 집에 선물 받은 게 한 권 더 있어서요- 하면서 쓱 건네려고요.




  번화가에 나가니 연말연시 분위기가 무르익어 술 생각이 간절합니다. 술을 못하지만 오늘은 한잔 하고 싶네요. 맥줏집으로 쑥 들어가 주문을 넣고는, 웬일이냐는 당신의 말이 멋쩍어 아무 말이나 둘러대 봅니다. 주위를 휘 둘러 봅니다. 저마다 할 일을 끝내고 와서, 제각기 한 테이블씩을 차지하고, 술과 함께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참입니다. 거듭 순배가 돌고 볼이 따끈하게 물들어가는 광경에 마음이 푹 놓입니다.


  당신과 술잔을 연거푸 부딪친 나도 느슨해져, 낮에는 터놓지 못했던 보퉁이를 끄릅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걱정거리 푸념거리 자랑거리 사는 이야기 옆구리에 끼고 온 이야기를 안주처럼 하나씩 꺼냅니다. 발목을 잡던 말주변 걱정은 저만치 사라지고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납니다. 어쩐지 스무 살처럼 밤을 지새워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앉음새가 흐트러질 만큼 마셨고, 뒤의 세세한 대목까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자리를 파하고 나서도 한참을 길거리에 서성이며 끝이 나지 않을 이야기를 이어간 끝에 택시에 당신을 태워 보낼 즈음, 무언가가 한겹 허물어지고 무언가가 다시 결속되는 소리가 들려왔음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지나가는 해는 서로의 왕래가 소원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탈을 마음으로 빌며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지내왔습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세상의 모든 당신께 연하장을 띄웁니다. 답장을 아니 하셔도 됩니다. 괜스레 인삿말을 뒤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건강히 지내시고, 새해에는 웃는 얼굴로 다시 뵙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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