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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한 Jun 15. 2016

남과 여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소회

(출처 - 구글 이미지)


남과 여.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단어다. 남과 여.

그런데 이 ‘자연’을 두고 요즈음 말들이 많다. 

이전부터 논쟁의 주제였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논란이 뜨겁다. 

오랫동안 세상을 덮어온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이 시작되고 약자로서의 여성이 드러난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인 동시에 주어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고자 선택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삶은 비선택적인 상황을 가진다. 내가 선택할 수 없다고 해서 무조건 가치가 없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깨닫는 기쁨은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중 많은 부분이 우리의 선택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쏟아지는 광고부터 시작해서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많다. 최선이 아니라 최고를 선택하는 모습들.

그런데 최고를 선택할수록 자꾸만 (이상하게도) 인간이 뒤로 밀려난다.


남과 여의 우위성을 논쟁하는 사이에 우리는 또 누군가를 뒤로 밀친다. 내가 선택한 의견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선택이 인정받아야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 뒤로 밀려난다 - 죽임을 당한다.


남성으로서의 존재, 여성으로서의 존재는 생명을 부여하는 신으로부터 ‘선택’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선택되었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를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시작점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멋진 외모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근육은,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유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권력은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선택의 오류를 멈출 수 있다. 밀려나는 어떤 사람을 붙들어줄 수 있다.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서는 당시 코린토 교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 한 문제가 바로 코린토 교회의 분열이었다. 아폴로파, 바오로파-편을 가르며 분열된 교회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교했던 것이다.


비단 한 종교의 분열뿐만 아니라 ‘남과 여의 논쟁’이라는 포괄적인 분열에도 이 말씀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최고를 선택하는 것을 멈추어야겠다.

더 이상, 내 주변의 누군가보다 뛰어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어야겠다.

경쟁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무엇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선택의 무한한 자유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다른 이에게 무엇을 참아줄 수 있을까.


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약하다는 것은 내가 살아내어야 할 생명(삶의 명령)이며 

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증거이다.


왜 남자는 여성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지 않고, 

왜 여자는 남성의 우둔함을 보듬어 주지 않는 걸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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