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만 5천명 이상이 희귀 난치성 질환을 진단 받습니다. 지난 11월 30일 질병관리청이 발간한 '희귀질환자 통계연보'에 실린 수치입니다. 이와 더불어 83개의 질환이 새로 희귀 질환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국가에서 희귀 난치성 질환으로 지정하면 해당 질병은 국가관리대상이 되어 치료비, 약제비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등록된 희귀 질환은 총 1248개에 달합니다.
희귀 난치성 질환을 진단 받았을 때, 그 질병으로 생명이 위독하거나 일상에 심각한 지장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물 치료로 증상을 경미하게 유지해가며 관리 차원으로 넘어가는 비율도 상당히 높습니다. 이 경우, 희귀 질환 자체보다 거기서 파생된 정신적, 심리적 피해가 더욱 심각할 수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경우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실 희귀 난치성 질환 환우분들을 위해 제가 마음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사용했던 방법들을 소개하겠습니다.
17년 하반기, 궤양성 대장염을 진단 받다.
궤양성 대장염은 대장에 만성적으로 염증과 궤양이 발생하는 질환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며 현재 의료 기술로 완치가 불가능해 중증 난치성 질환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나 심한 활동기를 억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 질환을 진단 받았을 때는 입시의 스트레스에 첫 발을 내딛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대입을 앞두고 심한 경쟁이 펼쳐지던 때, 우월한 실력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배우고 익혀서 살아남으려 악착같이 공부하던 시기, 그때 원인 불명의 난치병을 진단 받았습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완치도 안되고, 원인도 알 수 없다니.
왜 하필 나지? 이게 현실이 맞을까? 너무 짜증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겪는다고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인 용어들이 제 이야기가 된 입장에서 유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게 나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했고 현실에 분노했으며 종교의 힘을 빌려 타협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극심한 우울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때 스스로를 달래고 현실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 행동들이 몇 있었습니다.
1. 인정
삶에는 제가 바꿀 수 있는 영역과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마주한 궤양성 대장염은 바꿀 수 없는 영역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이 질환이 있다는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과 분노, 우울 등까지 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단순한 선언만으로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뒤따르는 조치들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지요.
2. 감사
같은 궤양성 대장염을 진단 받았음에도 저보다 훨씬 예후가 좋지 않은 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조금 불경스러울지라도, 제 증상이 그분들에 비해서는 한결 가볍다는데에 감사했습니다. 소화력이 낮아져 몇 달간 하얀 죽만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싸주신 짭짤한 무 반찬에 감격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자 했고 행복의 역치를 낮추었습니다. 감사가 일상이 되니 삶이 행복으로 가득 찼습니다.
3. 웃음
힘들지만 웃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인위적으로라도 웃어보았습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힘든 몸으로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역으로 웃어보면서 마음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웃음을 통해서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보고자 했습니다.
4. 몰입 & 운동
이전보다 체력이 떨어지고 관심 가질 수 있는 범위도 좁아졌습니다. 내 삶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에 최대한 신경을 줄였습니다. 고등학생 시기라 제가 그 순간에 공부하는 것들에 최대한 몰입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약해진 체력이 중요한 시기일 고3 시기에 스스로를 지탱해갈 수 있도록 매일 최소한도의 운동을 지속했습니다.
이렇게 최악의 시기를 넘기고 희귀 난치성 질환보다도 더 나쁜 영향을 주었던 마음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23년 하반기,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증으로 추정합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갑작스럽게 운동을 하려는 순간 짧게 원하는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처음 병원을 찾은건 초등학교 시절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구체적인 이름을 추정하지 못하고 약만 처방 받아왔는데, 성인이 되어 찾은 병원에선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증'이라는 이름을 내밀었습니다.
극희귀 질환에 속한다는 길게 이어진 설명을 지나 산정특례 설명을 들을 때, 저는 다시 무너졌습니다.
이전에 궤양성 대장염 진단 때 한번 경험해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답답하고 심란하며 제방이 무너져 우울감의 강물이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 다시 제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행동들을 적어봅니다.
1. 대화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았습니다. 사실 모두가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테니 제 마음의 짐을 쉽게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자칫 제가 다른 사람들을 감정 쓰레기통처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렇게 적는 희귀 질환 보유 사실이 사회에서 보이는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지 않고도 모든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존경하는 선생님, 오랜 시간 많은 것들을 나눠온 친구들, 상담 센터 등을 찾아 마음의 짐을 털어두었습니다. 삭막한 세상 속에서도 제 이야기를 경청하고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네준 분들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2. 용어 바꾸기
희귀, 극희귀, 난치, 불치, 원인불명 등등의 언어가 질환을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주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실제로 궤양성 대장염과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증은 제 삶과 함께한지 오래되었지만 약물 복용만으로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선까지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희귀, 난치 등의 단어를 계속 듣다보니 현실의 상황보다 미래의 막연한 불안으로 이들 질환을 더욱 염려하게 되더군요. 냉철한 판단을 위해서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용어를 바꾸어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희귀라고 부르지만 같은 입장의 환우를 찾으면 생각보다 많습니다.
난치라고 부르지만 약을 먹으면 증상이 호전되고 관리가 되는걸 압니다, 제가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난치성 질환이라기보다 '만성질환'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희귀 질환, 중증 질환으로 높여주지 말기로 했습니다.
원인을 모른다고 원인불명으로 부르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원인을 모르는 사건이 비일비재합니다.
제게 온 질병도 세상의 원리로 보면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현재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불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의학의 놀라운 발달을 볼 때, 제가 살아있는 동안 완치 방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때도 불치병이라고 불러할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있는 그대로 불러야하겠지만 일상에서 제 질환을 생각할 때 열거한 단어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난치, 희귀, 불치라는 단어로 마음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고자 하는 조치입니다.
언어가 바뀌니 제 생각도 바뀌고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심란했던 마음도 일상적인 생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저 하나에게만 집중하던 상태에서 다시금 내 주변과 다른 사람들까지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지요.
앞으로도 매년 희귀 난치성 질환을 진단 받는 분들이 나올 것입니다. 현재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수도 있고, 당장의 삶에 문제가 없다해도 예상되는 잠재 예후 상황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파오면 마음 역시 감기에 취약해집니다. 진단 직후부터 충격과 걱정으로 고통 받고 있을 마음을 먼저 어루만지고 가는 것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