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실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세계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철학논고』)는 한 문장으로 쉽게 인용되곤 한다. 철학적이거나 언어학적인 인용보다는 "모르면 말하지 마라"는 식으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경박한 무기로 각광받는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곡해된다. 언어에 대한 강박관념과 승리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애용어다. 언어는 철학도 예술도 종교도 모두 사용자의 정치적 이해나 사회적 욕구 충족을 위해 이용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을 팔고 그의 짧은 저서라도 읽었다고 내세우는 수준이라면, 선택적 왜곡과 착각의 정당화를 위한 언어의 편협한 남용은 혐오스럽다. 하이데거의 언어 철학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의미로 오용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그물망'만이 세계를 관장한다는 오류의 함정이다. 사람들은 이 한 마디에서도 각각의 해석과 필요에 따라 다른 의미를(때로는 정반대로 대입하는 마법을) 낚아 올려 그것이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확고한 의도에 눈이 멀었거나 고착된 시점을 벗어나지 못해 지적 오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철학자의 말도 그저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언어다. 욕망이 클수록, 욕망을 실현하는 데 능할수록 언어를 축약하고 단순화하는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본질을 드러나지 않게 왜곡하는 법을 안다. 선동의 성패는 축약의 기술에 달렸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철학적 명제로 적용되지 않을 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 부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철학적 언어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을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비한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에 있다'고 만년의 비트겐슈타인도 인정했듯이 (철학적)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가 더 방대하고 복합적이다. 진실은 언어의 바깥에 있지만 사람들은 언어로 진리의 성을 세우고자 하고 있다. 세계의 실상 또한 말의 관장을 받지 않는 곳에 더 크고 견고하게 있다. 언어 또한 불완전해서 복잡하고 모호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변하고 부분적으로는 발전하고 그만큼 파괴되기도 한다.
언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말한다. 실체가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실체가 없는 것들에는 언어적 실체를 부여하기도 한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지만 정확한 언어의 사용자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거울에 비추듯 보여주기도 한다. 간접적 언어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도달해 읽힌다. 천문학자들은 원소 주기율표에서도 별의 폭발과 충돌, 생성과 소멸의 폭풍을 본다고 했다. 언어가 지시하는 개체의 나머지 부분에 숨어 있는,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세계는 우주까지 확장된다. 증권사를 오래 다녔던 존경하는 선배는 주가 변동 그래프를 보고도 예쁘다는 표현을 썼다. 주가가 올라서 기쁜 것이 아닌, 오르고 내리는 그 변동의 곡선과 종목들의 개별적 등락 차이와 인과관계, 이런 모든 것들을 이미지로 보는 듯했다. 그것이 직업적 언어 습관이나 수사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눈에는 정말 예뻤을 것이다. 내가 그 아름다움의 세계를 알지 못할 뿐이다. 예술작품을 두고 좋다고 말하는 것도 처음에는 그것이 왜 좋은지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종종 사람들은 그것이 좋다 해야 할지 싫다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좋다는 느낌도 기초적인 것부터 고차원적인 것까지 학습되어야 하는 감정일 수 있다. 굳이 설명까지 해서 왜 좋은지를 밝힐 필요는 없지만, 좋다는 감정도 경험을 통한 인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시각적 경험은 언어나 지식으로 쌓이는 것보다 무의식과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철학이 언어로 세계를 묘사하고 규정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면 미학은 언어로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와 아름다움과 그것들의 흐름을 그 바깥 언어로서 두루 언급하고 그려내는 것이다. '언어의 그물망'으로 포획할 수 없어도 이미지를 지니는 것들의 관계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행위의 지속이다.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인식되는 더 큰 본질적 세계는 보이는 것 너머에 있고 말할 수 없는 것들 속에 있다.
말은 감각을 훼손할 수도 과장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세계 자체를 직접 보여주기는 어렵다. 신체나 정신의 감각들은 사람들이 먼저 이름 붙인 단어의 징검다리나 그 바깥의 그림자나 윤곽을 더듬는 말들의 총합으로 표현된다. 말도 지평선 너머를 보여주진 못한다. 말의 역할은 언급할 수 있는 거기 까지다. 그 너머는 감정과 상상이 하는 영역이며 이미지로써 드러나고 짐작할 뿐이다. 감각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체험된 사실과 언어에 대한 인식이 쌓여 그만큼 수용과 표현의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경험은 언어로 치환할 수 있는 기억뿐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로 무의식 속에도 자리 잡는다. 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던 감각이나 느낌 같은 것이 어떤 경험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렇다. 한 번 체험된 것들 중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감각되지 않던 것들이 신체와 정신에 닿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감각일 뿐 아니라, 지적 경험으로서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보는 수준이 삶의 수준이 되고 가끔 사람의 격(格)이 된다. 사유가 수반되는 경험을 통한 인식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익히 알려진 아름다움이란 단어 밖의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다.
보이거나 느껴지지만, 말로 온전히 그려낼 수 없는 사실들은 세상에 넘친다. 말은 때로 사실의 외부만을 언급하고 사실이 품고 있는 본질을 직설하지 않는다. 그 이후는 말의 역할이 아니라, 말로 도달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 속에 있거나 듣는 이의 세계관에 따른 상상 속에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 언어가 아니라 외양과 소리와 움직임을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의 바깥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계의 엄중한 존재와 사실 들을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신체 감각과 이성과 감정과 기억 같은 작용을 동원한 수용이다.
언어의 바깥에 있는 유무형의 개념과 무개념을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은 이미지다. 말이 되지 못한 언어 바깥의 여러 감각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볼 수 없는 것도 보여주고 들려주고 만지게 해준다. 언어와 이미지는 서로의 바깥을 둘러싸고 함께 혹은 따로 세계를 언급한다. 때로는 서로의 테두리나 그림자가 되어 실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말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미지는 말을 불러온다. 서로의 역할에 정확히 가 닿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각각의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본질은 때로 바깥의 일들로 설명되고 말은 그림의 선과 점이 그렇듯 일부로서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언어는 외형을 묘사하지만, 언어가 닿지 않는 숨겨진 내면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다. 언급은 추측보다는 드러난 사소한 사실들의 말이다. 말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수시로 부정되지만, 말은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짧은 말과 글은 더욱 정확해야 하고 사실의 정중앙에 자리 잡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것을 공자는 중용(中庸)이라 했다.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 있는 원만한 상태가 아니라 적중해서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적중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커다란 세계에 그어지는 획과 선의 부단한 붓질이 언어의 큰 그림을 끝내 완성해 낸다.
어려운 것을 쉽게 축약하고 단정하는 기교를 언어적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언어를 통해 확인하고 인정하고 설득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많은 경우 그것은 언어의 도구화에 능한 것으로, 언어의 참된 의미와는 관계가 밀접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포기하는 일이고 언어를 무기로 쓰는 일이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일수록 우리는 어렵게라도 실제에 찬찬히 다가가야 한다. 때로는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침묵이란 말할 수 없는 세계의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쉽게 말하지 않고 차근차근 세밀하게 말로 다가서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이에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다. 고정된 관점으로 즉각 단정하고 낙인찍으려 하는 것이 언어를 파괴하고 사실을 파괴하고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침묵은 때로 언어를 지키는 일이다. 언어 자체를 지키고, 언어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을 지키는 울타리다. 언어를 파괴하는 것에 언어로 대적하다 보면 언어 자체가 싸움의 도구일 뿐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리는 때가 있다. 언어를 하나의 계량화와 규정의 도구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세계는 무가치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말할 수는 없어도 보여주고 체득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두려워하고 숨기고 싶어 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말에 종속된 삶을 살 뿐이고 그들의 말에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싶어 한다. 세계를 언어의 울타리로 둘러싼 감옥으로 만들고 싶어 하고 스스로는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많은 경우 현실에서 이런 욕망과 전술이 효과를 발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고차원적이고 정밀하며 말할 수 없어도 다양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미지는 직관의 외연(外延)이다. 직관은 경험과 인식에서 유래하고 개인이 성숙한 딱 그만큼의 위치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 판단이다. 직관은 판단의 수준을 결정하고 삶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현실이라는 시간의 흐름 위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의 입체적 장면이다.
신화의 시대에는 인간의 언어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로고스 시대로 오면서 언어로 파악되는 것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들은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이기상, 하이데거(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