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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랩네뷸라 Jan 11. 2022

동그란 생각, <벼랑 위의 포뇨>

지브리답지 않은 개연성과 창의성이 우리를 더욱 어린이처럼.

벼랑 위의 포뇨 (2008)


이 우물이 가득 차면 다시 바다의 시대가 열리는 거야.
캄브리아기에 필적할 만한 생명의 대폭발.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지구는 거대한 생명의 파도에 휩싸였다.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간단한 원생생물은, 거대한 육체를 이루어 생명의 마당을 마음껏 뛰노는 동물이 되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여러 갈래로 퍼져 현재의 지구를 이루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생태주의는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자 지구의 생태계가 원활히 작동하는데 매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이 바다를 파괴하고 있다고 여긴 후지모토는 생명의 물을 이용해 인간을 멸하고 새로운 생명의 품을 창조하려 했다. 물론, 포뇨의 소스케를 향한 사랑과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 후지모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영화에서 물고기는 모든 생명을 대변하는 존재이자, 앗아가는 존재이자, 포뇨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포뇨가 뭍으로 올라오며 일으켰던 해일은 어린 소스케의 눈엔 물고기 떼의 힘찬 발돋움으로 보였고, 관세음보살이라고 불리던 그란맘마레의 등장에선 금색 물고기가 생명의 어머니가 가진 신성함을 한층 돋보여준다. 인간이 이룬 거대한 문명은 포뇨가 데리고 온 물고기로 인해 고요히 가라앉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마치 데본기 바다로 돌아간 것 같아요.


 그란맘마레는 인간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킨 고요한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데본기는 진화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어류가 등장한 시기이다. 현재도 남아있는 실러캔스와 같은 육기어강의 생물이 바다를 유유히 누비는 모습은 자구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함을 그려낸다. 이는 현실과 고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전지전능함과 신성함, 그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 준다.



소스케, 이 세상엔 운명이란 게 있어.
원래 운명은 바꿀 수 없거든.
포뇨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니까 바다로 돌아갔을 거야.


 포뇨가 사라진 후 침울해하는 소스케에게 리사는 말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운명론적 가치관이 돋보인다. 운명이라는 단순한 단어 하나만으로, 우리는 수많은 사건과 현상을 정당화할 수 있다. 사건을 거부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운명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어리고 순수했으면 좋으련만

 후지모토의 포뇨를 향한 이 말도 운명론적 가치관 앞에선 당연하게 부정된다. 포뇨가 소스케를 사랑하여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며, 영원히 어리고 순수한 생명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뇨는 자신을 옭아매려는 아버지 후지모토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자발적인 삶을 택하게 된다. 후지모토가 체념하고 포뇨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포뇨와 소스케의 진실되고 꾸밈없는 사랑


 그란맘마레(Granmamare, グランママレ)의 グランマ는 영어로 할머니를 의미하고, マレ는 라틴어로 바다를 의미한다. 포뇨의 어머니 그란맘마레는 바다 그 자체이자 현재의 바다와는 시대를 상이하는, 예전의 거대한 생명의 요람을 상징한다. 이름 하나에서조차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감독의 섬세함은 작품을 보면서 여러 상상을 가미하게 해주고 감상하는 동안 내가 어린이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이의 시선에서 본 쓰나미의 모습은 거대한 물고기가 떼를 이루어 가는 장관이었다. 작은 장난감 배를 실제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고, 물고기의 몸에서 팔다리가 돋아나는 창의성은 20살이 된 현재로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안될 걸 알지만, 나도 영원히 어리고 순수했으면 좋겠다.


2022.01.0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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