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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Aug 14. 2024

혼자만의 방 (부록)

(오래전 블로그에 '혼자만의 방'에 관해 쓴 글이 있다. 어느 날 아내가 뒤늦게 이 글을 발견하고는 좋아했다. 그래서 부록으로 남긴다.)


1. 예전에 내가 살던, 2층 월세방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존재가 그것들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본능적으로, 그의 고독의 그 공간들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공간들이 현재로부터 영원히 지워져 버려 이후 일체의 장래의 희망과 무관해져 버렸을 때에라도, 이젠 지붕밑방이 없을지라도, 다락방이 잃어져 버렸을지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이 어떤 지붕밑방을 사랑했었으며 어떤 다락방에서 살았었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밤의 꿈속에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초라한 작은 방들은 조개껍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잠의 迷路의 끝에까지 갔을 때, 우리들이 잠의 깊은 지역에 다다랐을 때, 우리들은 아마도 前人間的인 휴식을 알게 될 것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공간의 시학〗1958 번역 곽광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바슐라르를 흉내 내어, 내 방의 벽은 세계의 공포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고, 천장은 우주에의 몽상으로 나를 이끌었다고 말할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 방에서 나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았으므로, 나는 저 방에 대해 뭔가 구체적이고 생생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어진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흔들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듯이, 저 방이 당시 내 궁핍한 처지와 무기력하면서도 아름다운 꿈들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했었다고, 내 인생은 저런 방에서도 머물다 흘러갔었노라고.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2. 테프론코팅이 안 된 프라이팬


나에겐 검고 조그만 프라이팬이 있었다. 때때로 나는 달걀 프라이를 해 먹었는데, 언제나 저 괴팍하고 식탐이 넘쳐흐르는 프라이팬에게 절반은 양보해주어야 했다. 저 볼품없는 프라이팬은 자신은 결국 먹지도 못할 달걀 프라이를 완강히 입에 물고 놓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프라이팬을 내 첫 애완동물로 삼기로 했다. 프라이팬은 괴팍했지만, 아주 예민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어서... 짝 없는 양말 한쪽을 그의 친구로 삼아주었다.


3. 장마철에 만난 조그만 새끼 고양이


장마철이었다. 아니면 큰 태풍이 와서 며칠 째 비가 계속 내렸었는지도 모르겠다. 늦은 오후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비를 피해 들어와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고양이는 비 오는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려 하면 고양이는 비 오는 바깥 풍경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며칠에 걸쳐 새끼 고양이를 길들였고, 내 방에서 먹을 것을 나눠먹었다. 물론 작고 검은, 테프론 코팅이 안 된 프라이팬과 함께.


고양이는 낮에 바깥에서 놀다가 가끔 돌아왔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밤에는 잠을 같이 잤다. 어린 고양이에게 세상은 무서운 거니까.

고양이는 내가 내 방을 좋았했듯이 나를 좋아했고, 나도 내 방이 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듯이 내 가난한 사랑을 고양이에게 베풀었다. 그렇게 장마가 끝나고 몇 차례 태풍도 지나고 추운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날 동원예비군훈련 소집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커피나' 깡통을 열어보았다. 거기엔 내가 가진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십 원짜리와 오십 원짜리 동전들. 그것으로 나는 비눗방울 장난감이나 풍선껌, 어쩌면 구두약이나 구둣솔 같은 것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 커피와 밥을 얻어먹고, 여비를 빌려왔다. 바람이 꽤 차가운 시월이었다. 방에서 군복을 챙길 때, 고양이는 어디서 놀고 있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을 때, 거기 고양이가 와 있었다.

나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때, 샀던 참치캔을 뜯어 계단 뒤쪽 숨기 좋은 공간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참치캔에 다가가려 하지 않고 내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뒤돌아 보며 대문 앞에 서있는 나를 향해 '야옹'하고 울었다. 고양이가 우리들의 방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잠시 떠나 있어야 했다.


그게 고양이와의 마지막이었다. 훈련 중에 한 출판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었고.

그러나 취직은 되지 않았다.


나는 그해 겨울을 어느 술집의 아늑하고 따뜻한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며 보냈다.

겨울비가 내릴 때면,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 귀여운 네 발이 모두 젖겠구나'하고 근심했다.

그리고 지친 몸으로 내 아름다운 방에 돌아와 침대 위에 쓰러져 깊고 깊은 잠을 잤다.  


4. 나중에 들은 내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팔이 네 개 달린 가네샤 신처럼 일해야만 했다.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거품기, 다른 한 손에는 망건지기, 다른 한 손에는 소스병을 들고.


눈이 많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한 고양이를 만났다. 나는 그 고양이가 내가 기르던 그 새끼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수염은 우주에서 날아온 미세한 전파들도 잡을 수 있고, 대기권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라디오 방송 전파들 중에서 '스카보로 페어'만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하다고 소개한 그는, 내 고양이의 소식을 알고 있다고 했다.


대가는 싱싱한 삼치구이. 나는 그에게 그것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예민한 수염이 접한 소식에 의하면,

내 고양이는 취객을 상대로 오카리나를 불고 기타를 치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 내가 살고 있던 방 주인은 집을 팔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방을 비워야만 했다.

그 집은 카페가 되었다. 나는 최근에도 몇 번씩, 내가 살던 집 앞을 지나간다.

그곳이 내 삶으로부터 멀어져 생경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2005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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