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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Aug 21. 2024

일요일 저녁 영화

1.

토요일이었다. 눈을 떠보니 점심을 넘긴 시간이다. 의자의 그림자가 창쪽으로 짧아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투명한 술병에 넣어 바다에 흘려보낸 쪽지처럼 물결에 떠밀려 토요일에 당도해 있다.


2.

주중 평일이라는 배는 그렇게 거친 해류를 표류하다 가끔 태풍도 만나고는 금요일 저녁, 블루먼데이라는 술집에 좌초되어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술에 취한 채 내가 타고 있던 배와 함께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동시에 내 영혼을 두 번 접어 투명한 술병에 넣고는 거센 파도에 내던진다.


3.

그리하여 이렇게 햇살에 은빛 거품이 부서지는 한적한 해변가, 아니 내 침대에 떠밀려와 누추하게 쓰러져있는 것이다.


4.

여전히 어제의 술집에서는 어제의 내가 있다. 그가 술에 취한 채, 또 한잔을 기울이려는 찰나 그는 급히 오늘 이 순간으로 소환된다.

그렇게 돌아와 두 번 접힌 쪽지가 되어버린 영혼을 마주하니 그는 알코올로 된 거센 파도에 휩쓸린 터라 뱃멀미와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있다. 나는 그런 나를 위해 냉장고를 뒤지거나 배달 음식을 시킨다. 그렇게 속을 달래고 나면 나는 내 영혼을 다시 두 번 접어 빈 술병 속에 도로 넣어둔다. 나는 두 번 접힌 쪽지로 돌아와 투명하게 일렁이는 피로에 젖어 바다처럼 깊은 꿈을 꾼다.


5.

꿈을 꾸고 있는 나는 꿈속에서 침대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얌전하게 두 번 접힌 쪽지를 펼쳐본다. 종이 양면 모두 어지러운 손글씨가 쓰여있다. 한쪽 면에는 결국 신청하지 못한 신청곡 몇 개가 적혀 있다.


- Last Year’s Man - Leonard Cohen
- Cotton Eyed Joe - Nina Simone
- I Shall Be Released - The Band
- I’m So Lonesome I Could Cry - Yo La Tengo
- Hello It's Me - Lou Reed & John Cale
- Forget About - Sibylle Baier
- Canción mixteca - Harry Dean Stanton (Paris, Texas)


신청곡이 너무 많다. 전날 술에 많이 취했음이 분명하다.


6.

쪽지의 또 다른 면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다.


“내가 가끔 회상하는 건, 그날
잠에서 처음 깨어 나무 그늘 꽃 위
에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
는 무엇이고 어디 있고 어디서 어
떻게 그것에 왔는가를 의아해 하던
그때의 일*”


7.

그런 아름다운 낱말들이라면 좋겠지만, 쪽지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어야 좀 더 마땅할 듯하다.


“지금 가야 또 오지.”


전날 나는 술에 취해 블루먼데이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면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에서 아래와 같은 추억의 목소리와 선율이 따라온다.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다.


♪ 오리에엔트 아날로그~♫

새 시대를 앞서 가는 여러분의 문화방송입니다. HLFV-FM

♪ 오리에엔트 아날로그~♫

수정 손목시계 오리엔트 아날로그
오리엔트시계 제공 시보 새벽 네 시를 알려드립니다.


이어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부터  ‘아듀 졸리 캔디’라는 노래의 전주가 울려 퍼진다.


밤 바닷바람 같은 낭만적인 노래다. 문득 그립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희미해졌지만.


8.

토요일이란 이름의 영혼과 육체의 하수종말처리장을 지나쳐 나오면 일요일이라는 한적한 해변이 펼쳐진다. 나는 두 번 접힌, 한쪽 모소리가 찢긴 쪽지가 되어 투명한 유리병 안에 있다. 일요일 오전의 눈부신 햇빛이 침대에 누워 있는 쪽지의 뺨을 어루만지듯 물결이 되어 몰려왔다 물러갔다.


9.

그렇게 다시 태어난 성스러운 일요일에는 나만의 성무일과가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밀린 얼마 되지 않는 집안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어제 남긴 검소한 식사를 하고 의도하지 않은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 그렇게 오후의 긴 해가 저물어 창문을 계절마다 다른 빛으로 물들이면,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10.

엄마와의 통화는 대체로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나는 주로 듣고 엄마는 주로 이야기했다. 대체로 나의 관심사와는 먼 얘기여서 뭐라 대꾸할 수가 없어 적절히 추임새만 넣는 그런 일방적인 통화였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신상에 관한 일, 엄마가 겪은 일, 엄마가 관찰한 일에는 엄마의 다양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고독이 있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쯤 올 수 있니?”


11.

고향 방문 일을 정하면, 엄마는 그때부터 달력에 날짜를 지워가며 날 기다리셨다. 내가 집에 돌아올 날이 다가오면, 늙은 엄마는 김을 굽고 무 생채를 무쳤다.


12.

엄마의 일생은 단무지와 물에 만 찬 밥이 놓인 조그맣고 낡은 밥상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한 밥상에서 그 수명이 다한 형광등처럼 엄마의 몇 수 십 번인가 남은 일요일이 저물고 있었다. 엄마는 너무 오래 고독하셨고 나는 너무 오래 그 고독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13.

엄마와 길고 긴 통화를 끝내면, 엄마 방에도 찾아들었을 어둠이 내 방에도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내가 들어가 있던 유리병은 검은 사각형 상자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길고양이처럼 굴었다.


14.

‘일요일 저녁 영화’란 그럴 때 내가 내 작고 검은 사각형 상자 안에서 상영하던 동시상영 영화다.

총천연색 동시녹음.


15.

‘일요일 저녁 영화’는 결혼하기 전인 독신 시절,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분류한 장르였다. 말 그대로 엄마와의 통화 이후 어둠과 함께 잦아드는 어떤 씁쓸함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요일 저녁에 틀어 놓는 영화들. 분류법은 간단하다. 손에 땀을 쥐거나 흥분케 하지 않고 슬픈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낯선 외국어 영화일 것. 그리고 이미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영화일 것. 그게 다다.


16.

당시 즐겨 보았던 ‘일요일 저녁 영화’로는 미키 사토시 감독의 〖텐텐転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 歩いても〗,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Mies Vailla menneisyyttä〗가 대표적이고 몇몇 작품이 더 있다.


17.

‘일요일 저녁 영화’는 감상을 목적으로 상영되지 않는다. 이미 본 적이 있는 영화, 낯선 외국어 영화인 이유가 그러하다. 영화를 틀어놓고 나는 딴짓을 하곤 했다. 소셜 미디어를 훑어본다든지, 책을 훑어본다든지. 고립되어 있고 싶었지만, 완벽한 고립은 조금은 싫어했던 것 같다. 그저 라디오 전파처럼 희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8.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새 맥주에 취해 있었다. 소셜 미디어에 무언가 글을 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그걸 참느라 애썼다. 취기가 오르다 보면 이미 본 영화라도 다시 집중해 보기도 하고, 영화를 끄고 내가 즐겨 듣는 노래를 찾아 듣기도 했다. 술안주로 좋은 노래, 좋은 음악만 한 것도 없으니까.


19.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한 주는 지난주보다 수월히 지날 것인지 아니면 더 최악인 한 주가 될 것인지는 즉석복권처럼 은회색 벗겨지는 잉크로 가려져 있기도, 이미 더 큰 고난과 시련이 마련되고 예고되어 우편함에 배달되어 있기도 했다.


20.

‘일요일 저녁 영화’는 그런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 그리고 무책임에 대한 나의 주의를 돌리는데 또 다른 목적이 있었기도 했다. 그럼에도 밤이 깊을수록 어쩐지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들곤 했다. 이 평화로운 일요일 저녁이 사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뚜렷해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언제까지고 일요일 저녁인 채로 이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싶었다.


21.

결국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되어 가까운 거리에 있던 블루먼데이를 찾는 일도 종종 있었다. 조금은 적적하기도 했고 잊고 싶은 일들도 많았고 유예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22.

혼자 또 다른 컴컴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 블루먼데이 사장은 언제나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월요일을 위해 모두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일요일 저녁 혹은 밤이었다. 누군가는 이미 깊은 잠으로, 누군가는 잠자리에서 하염없이 뒤척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조그만 쪽지를 집어 들어 엉망인 손글씨로 신청곡을 적어 내려갔다.


- Last Year’s Man - Leonard Cohen
- Cotton Eyed Joe - Nina Simone
- I Shall Be Released - The Band
- I’m So Lonesome I Could Cry - Yo La Tengo
- Hello It's Me - Lou Reed & John Cale
- Forget About - Sibylle Baier
- Canción mixteca - Harry Dean Stanton (Paris, Texas)


23.

나약하고 비겁하고 무책임한 존재를 위로해 주는, 이토록 좋은 노래들이 밤하늘 별들만큼이나 무수히 많다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본문에 인용한 문구는 이상희 시인의 〖잘 가라 내 청춘〗 (1989)이란 시집에서 빌려왔다. 존 밀턴의 실낙원 중에 나오는 문구다.


That day I oft remember, when from sleep

I first awak't, and found my self repos'd

Under a shade of flours, much wondring

where And what I was, whence thither brought, and how.


- 〖Paradise Lost〗  Book 4, John Milton


본문의 번역은 이상희 시인의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의 띄어쓰기는 시인의 그것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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