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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Sep 04. 2024

엄마가 이 세상에 계셨네 01

1.

엄마는 1944년 음력 2월 초파일, 양력으로는 3월 2일 일본 도쿄 지금은 알 수 없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이다. 80년 전 엄마는 작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다.


2.

74년의 세월이 흐르자 아기는 늙고 심장이 비대해진 노인이 되어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2018년 1월 5일, 음력으로는 11월 19일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엄마는 그렇게 충남대학교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으셨다. 사실은 좀 더 일찍 세상을 떠나신 참이었다. 다만 의료진이 약물로 엄마를 조금 더 세상에 붙잡아두었다. 서울에서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내려오는 아들에게 임종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3.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는 수많은 아기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처럼.


4.

엄마에겐 자신이 태어난 일본 생활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45년 일본제국이 패망한 이듬해 외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충청남도 청양군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는 너무 어린 아기였다.


5.

아래 이야기는 모두 어린 시절 외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6.

어느 날, 밤이었다. 젊은 아기 엄마였던 외할머니는 주변의 소란과 심상찮은 불빛에 놀라 다급히 갓 돌이 지난 아기를 등에 업고 손위 어린 남매를 양손에 붙들고는 조선 이불을 뒤집어쓰고 황급히 목조 가옥에서 몸을 피했다. 동네 근처에 있던 조그만 야산으로 몸을 피신하고 나서, 남매 중 하나를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어디 있는지 모를 남편을 찾아 헤매었는지, 조선 이불은 피신한 장소에 그대로 두고 또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하늘도 땅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어찌어찌 상황을 파악하고 혹은 수습하고 피신한 장소에 돌아오니 두툼한 이불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에서는 불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다 터버린 뜨거운 나뭇가지가 떨어져 내렸다. 파편은 맹렬히 파고들고 폭음은 정신을 산산조각 내었다. 이불은 그런 것들로부터 조금이나마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자 큰 재산이었다.

한참을 둘러보니 근처에 피신해 있던 남자가 갖고 있다. 남자는 조선말밖에 할 줄 모르는 젊은 아낙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걸 보고는 미안하다며 군말 없이 이불을 돌려주었다. 외할머니는 이불을 되찾아 어린아이들과 뒤집어쓰고는 화염에 뒤덮여 대낮처럼 눈부시고 겨울임에도 지옥처럼 뜨거운 도시를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화염에 뒤덮인 도시 어딘가에 남편이 있었다.


7.

도쿄대공습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던 밤 이야기다. 외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그 난리통에 극장에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당시 도쿄가 쉼 없이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태연하게도 늦은 저녁, 혼자만의 문화생활을 즐기고 계셨던 것이다. 대단하게도 또 다행스럽게도 외할아버지는 그 불구덩이에서 생환하여 다음 날 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8.

외할머니는 청양에서 이름난 양반집 규수셨다고 한다. 내가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외갓집 친척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집을 잘못 오신 듯했다. 외할머니네 집안에서 언젠가 외갓집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동래 정 씨도 양반인가?”

외할아버지는 넷째 막내라 물려받은 재산이 변변치 않았지만, 선대 재산 거의 대부분을 상속한 첫째 큰 외할아버지네는 나름 청양에서 이름난 부자였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9.

큰 외할아버지는 청양에서 이름난 큰 부자였는데, 형제들에게는 인색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그 많던 재산은 당숙 대에 와서 모두 봄볕에 눈 녹듯 사라졌다. 흔한 이야기다.


10.

외할머니는 일흔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몸 단장을 먼저 하셨다. 낡은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으시고 이제 숱도 없고 하얗게 빛이 바랜 머릿결을 쪽 빗으로 곱게 빗어 일생을 걸쳐 닳고 닳은 은비녀로 고정하셨다. 여느 시골 노인과 다를 바 없으나, 외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기품 있는 분이셨다.


11.

그렇다. 어쩌면 양반집 귀한 딸이었던 외할머니는 잘못된 짝을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짝을 만나 가지 않아도 되었을 일본에 까지 가서 네이팜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경험하고 또 한평생 허리가 굽도록 농사일로 고생을 하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 역시 잘못된 짝을 만났다. 큰 이모도, 작은 이모도 그리고 얼굴을 뵐 적이 없는 아버지의 엄마, 친할머니도.


12.

그들은 모두 잘못된 짝을 만나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 또한 세상에 흔한 이야기다.


13.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바다가 된 세상에서 연약하게 흔들리는 삶. 엄마의 삶이란 그렇게 시작부터 위태로운 것이었다. 한편 강하고도 질긴 삶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안 든다. 강하고 질긴 삶만큼이나 오래도록 고통을 견뎌내야 하니까.

이 또한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14.

그게 가능하다면, 그때로 거슬러올라가 어린 아기이던 엄마를 끌어안고 볼과 이마에 입 맞추고 싶다.

그 아이가 겪게 될 세월은 참으로, 그 불길만큼 뜨겁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까.


15.

어린 시절 엄마는 영민했다고 한다. 외갓집 친척들은 나를 보면 늘 엄마가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말해주곤 했다. 그래봤자 시골 소학교에서 이름을 날린 것이었을 테지만. 선생님이 먼 시골길을 걸어 외갓집으로 찾아와 어린 엄마가 학교를 안 나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도 한다. 당장 먹고살 것이 없는 데다 일손이 부족한 시골에서 공부는 사치였을 것이었다. 엄마가 부뚜막에서 불을 때며 그 희미한 불빛에 책을 비춰 몰래 공부를 할라치면 외할머니는 매질을 하셨다고 한다. 한편 외할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아끼셨던 것 같다.


16.

둘째 누나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늦은 저녁 우리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전교에서 늘 1, 2등을 다투던 누나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시켰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선생님이 다녀간 다음, 엄마는 선생님을 배웅하는 길 어디선가 잠시 어둠 속에서 서계셨다. 둘째 누나는 울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17.

떠올려보면 엄마의 삶은 어둠 투성이지만, 사실 엄마는 활달한 성격에 웃음도 많으셨다. 아이들과 들꽃, 풀과 나무, 고양이며 강아지, 새들을 사랑하셨다. 남편의 폭력에 영혼마저도 짓이겨지곤 했지만, 엄마는 자신이 타고난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완전히 잃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엄마가 환갑을 넘긴 시점이었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무더위에 냉장고에서 꺼내 둔 음료수 병에 물방울이 맺히고 이윽고 흘러내렸다.

“얘도 더워서 땀 흘리네!”

나에게 늙은 엄마는 귀여운 아이 같았다. 어릴 적 파마머리를 처음 하셨을 때는 대웅전에서 막 걸어 나온 부처님 같아 질색하였지만, 나이 들어 그러잖아도 조그만 몸이 더 작아진 엄마는 곱슬머리를 한 명랑한 아이 같았다.


18.

엄마는 늘 공부에 미련이 많았다. 병석에 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겼을 때, 엄마는 운전면허 필기교재를 어디선가 구해와서는 공부를 하시겠다고 했다. 엄마는 운전을 하고 싶어 하셨다. 병색이 완연하셨을 때는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적당한 책을 구해드렸고 엄마는 영어 공부를 시작하셨다. 물론 공부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뒤늦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나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19.

외할머니는 장난기 많고 총명한 둘째 딸을 못마땅하게 여겨 험한 일만 시켰다고 한다. 베 짜기, 수놓기처럼 앉아서 하는 일은 차분한 성격의 첫째, 그러니까 나에게는 큰 이모의 몫이었다. 엄마는 나이 든 노인이 되었을 때도 가끔 자신의 엄마를 원망하셨다.


20.

엄마는 처녓적 결혼하기 싫으셨다고 한다. 선자리가 잡혀도 늘 도망 다니기 일쑤여서 외할머니 속을 많이도 끓였던 모양이다. 스무 살이 넘고 몇 해가 지나 당시로서는 노처녀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만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어디 읍내에 나갔다가 술자리에서 잡힌 선자리라고 했다.

남편 자리는 소처럼 듬직하고 과묵한 인상이었다. 충청남도 예산 사람으로 강원도 정선에서 떠돌이 광부 생활을 하다 이제 대전에서 자리를 잡으려 한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시골을 떠나 대전이란 도시에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였던 남자와 신혼살림을 차렸다.


21.

단칸 신혼집에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번듯한 도시에 거처가 생기자 남편의 어린 이복동생들도, 친정의 어린 동생들도 객식구가 되었다. 그러다 스물넷 엄마는 첫 아이를 갖게 되었다. 산달이 되어 외할머니가 집으로 오셨고 아이를 받았으나, 거꾸로 들어서 있던 아이는 탯줄이 목에 감긴 채 죽어 있었다.  


22.

시아버지가 어디선가 점을 보고 와서는 타박했다. 남편을 어린 시절부터 내팽개치고는 딴살림을 차리고 평생 한량처럼 살던 사람이다.

“네 팔자에는 아들이 없다더라.”


23.

첫 아이를 잃고 나서 이년 후, 엄마는 첫째 딸을 낳았고 또다시 이년 후 둘째 딸을 낳았다. 남편은 우리 형편이 이러하니, 이제 아들 낳을 생각은 말자고 하셨다.    

엄마는 어느 날, 태몽을 꾸었다. 썩 괜찮은 태몽이었다. 남편에게 임신 사실을 숨기고 몇 달 동안 뱃속 아이를 품었다. 시아버지에게 이제 더 이상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딸들은 세상에서 제 뜻을 펼치고 살 수 없으리라, 나처럼. 그러나 아들이라면 다르겠지. 하고 엄마는 생각하셨을 것이다.


24.

그러나 그야말로 기쁨도 잠시였다. 엄마는 나를 낳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에 걸리셨다. 지금이야 결핵이 별거 아닌 병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엄마의 병세는 점점 위중해졌다. 귀한 아들을 얻었지만, 이제 언제고 어린아이들과 당시만 해도 말 수 없고 성실했던 남편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먼 길 떠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25.

그 시절, 그때쯤 나는 꿈을 꾸었다. 네다섯 설 정도 나이였을 것이다. 나는 그 꿈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내가 세상에 나온 후, 기억하는 최초의 것이다. 꿈 내용은 이렇다.

엄마는 건강한 모습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양치를 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의 등에 업히려 하자, 엄마는 그런 나를 매몰차게 물리치셨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 하염없이 걸어가셨다.  


26.

나는 울면서 깨어나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그때 아픈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캄캄한 방에 누워 계셨다. 엄마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어루만져 주셨다. 엄마 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나는 엄마가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나를 두고 어디론가 떠날 것만 같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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