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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Sep 26. 2024

고무마개를 잃어버린 욕조의 노래

1.

서른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대학로로 이사한 건 순전히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술집이 많아서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긴 했다. 그 무렵에도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곤 했는데, 막차라도 잡아타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렵사리 빈 택시를 잡아봤자 기사들은 창문을 빼꼼히 열고는 행선지를 물어보았고 내 답을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달아났다.


2.

그게 이사의 첫째 이유긴 했다. 늦은 밤 귀가가 너무 어렵다는 것. 그때는 택시 승차거부가 심했다. 뭐 택시 기사들도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늦은 밤 나는 택시를 잡느라 길가에 내놓은 쓰레기더미들과 가로등 불빛과 불 꺼진 방과도 같은 가로수들 사이에서 낙엽과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3.

막차 버스만 탈 수 있었다면 나는 이사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술집들, 그러니까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틀어주는 술집들이 잔뜩 있었던 대학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을뿐더러, 흔들리며 내달리는 버스 창으로 보는 풍경을 사랑했으니까. 출퇴근 시간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반 한 장을 듣기에 적당했다.

당시 퇴근길 버스에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음반을 자주 들었는데, 그 음악들이 버스 창밖 풍경과 제법 잘 어울렸다. 특히나 종각에서 종로 5가로 이어지는 어떤 쇠락의 점층법과 같은 풍경들과.


4. 

대학로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많다. 가을에는 커다란 손바닥 같은 낙엽이 묵직한 첼로 선율로 바닥에 떨어진다. 늦은 밤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때, 차창 밖으로 가을바람에 서로 뒤엉킨 채 어디론가 달려가는 낙엽들과 가벼운 쓰레기들을 구경하곤 했다. 한밤중 쓸쓸한 거리, 떠들썩한 질주.


5. 

그것들은 어디로 달려가는 걸까? 답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애틋한 물음표들로만 이루어진 달리기 경주였으니. 그리고 나는 또 세월에 휩쓸려 지금 어디에 당도해 있는 것일까? 이 역시 그 답이 궁금하지는 않다. 이와 비슷한 제목이 붙은 폴 고갱의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이런 질문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과 그림 제목을 아무리 일치시켜보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6.

내가 대학로로 이사한 해의 가을은 지난해 가을보다는 괜찮은 계절이었다. 지난해 가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터였다. 엄마의 비참과 나의 무능을 똑똑히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달 정도 홀로 된 엄마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더욱 작아진 엄마를 어떤 공허에 남겨둔 채.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나에게 적당한 일을 찾고 또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당장 생활비를 벌기 일자리를 소개받아 일산가구공단으로 출근했다. 일산가구공단이라고 해서 가구 만드는 공장이 잔뜩 있나 했는데, 그저 허름한 건물에 마당이 있는 텅 빈 공장 터들만 즐비했다. 나는 그러한 공장 중 한 곳에서 중국이나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아주머니들과 함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을 만들었다.

철제 구조물들, 용접봉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엄청난 양의 페인트 스프레이들,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전나무 잎들, 반짝이는 플라스틱 가루가 한없이 떨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가짜 은방울 금방울들, 은하수나 트윙클처럼 예쁜 이름이 붙은 작은 전구들이 달린 전선들. 연말에 제시될 꿈의 재료들은 그러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같이 일했던 외국인 아주머니들은 서툰 한국어로 ‘예뻐요, 예뻐요’라고 말했다. 바람이 차가운 11월이었고 대기는 투명했고 차갑게 식어버린 햇살이 꽤나 보기 좋았었다.


7.

공장의 너른 마당 한 구석엔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한 간이 화장실이 있었고, 화장실 옆에는 노랗게 색이 바랜 억센 잡풀이 어린아이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출입구에는 공장을 지키는 개 두 마리가 묶여 있었다. 꾀죄죄한 행색의 백구와 작고 사나운 개였다. 작은 개는 사람을 보고 무조건 짖었고, 백구는 무조건 꼬리를 흔들었다.

덩치가 큰 크리스마스트리의 철제 구조물 도색은 너른 공장 마당에서 숙련된 직원들이 했다. 크리스마스 장식물이나 황금색 페인트 스프레이가 무척이나 많이 쓰였다. 스프레이에서 분무된 황금빛 끈적끈적한 입자들은 11월의 쓸쓸한 삭풍을 타고 모두 백구에게로 날아갔다. 직원에게 백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8.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백구는 차갑게 식은 11월의 햇살에도 눈부시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황금개로 변신한 백구에게로 다가갔다. 검고 작은 개가 짖었다. 황금개로 변신한 백구는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쓸쓸하고도 촉촉한 콧잔등이며 애잔한 눈빛에 11월의 빛이 떠돌고 있었다.


9.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그리스로마신화를 변신이란 주제로 풀어낸, 말 그대로 <변신>이란 책을 썼다.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책에 내가 본 황금개로 변신한 백구 이야기도 넣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고 싶다.

‘그때 아마 너의 폐도 황금빛으로 물들었겠지…’


10.

대학시절, 나는 이러저러한 사물들에게서 일종의 우정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다. 앞서 썼던 글에 나오는 ‘식탐이 있는, 테프론 코팅이 안 된 프라이팬’이 그런 예다. 또 다른 것도 잔뜩 있었다. 우선 화장실에만 국한하자면, ‘마리아 칼라스의 영혼이 깃든 세면대’, ‘과묵하지만 유능한 심리상담가인 수세식 변기’, ‘고무마개를 잃어버려 어쩔 줄 몰라하는 욕조’ 따위가 그렇다.


11.

‘마리아 칼라스의 영혼이 깃든 세면대’는 이른 아침이나 오전에 내가 양치질이나 면도를 할 때,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한다. 등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양칫물을 그대로 입에 머금은 채 노래를 끝까지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세면대의 기도에 물을 흘려보내야 할지를 고민한다.

‘과묵하지만 유능한 심리상담가인 수세식 변기’는 매우 전문적이라서 내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주곤 했다. 문제는 자리를 뜨는 순간, 내가 쏟아낸 번민이며 고통 따위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프로다웠다.


12.

‘고무마개를 잃어버려 어쩔 줄 몰라하는 욕조’는 이상하게도 제일 마음에 가는 사물이었다. 나 역시 이십 대 시절,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계속 받아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지만.

내 영혼의 진열대에 있는 ‘고무마개를 잃어버려 어쩔 줄 몰라하는 욕조’에서 황금개를 씻길 수만 있다면. 공상과 몽상에 빠져 살던 한심한 20대는 그렇게 30대가 되었다. 


13.   

내 이십 대 끝자락과 삼십 대의 시작은 그러했다. 그다음 해 늦은 여름,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비타민 한 알을 먹는다.
냉장고에서 며칠 전에 사두었던 와인을 꺼내와 마신다.
절반 정도 남겨 코르크 마개로 꼭 막아둔
늦여름 맛이 시큼하다.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쐬며 쌀쌀한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추운 날씨에 스웨터를 입고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비 올 듯, 구름이 잔뜩 낀 가을의 서늘한 공기에서는
어릴 적 먹었던 가짜 피넛 버터크림이 발린 크래커의 향이 나니까.
그리고 내 인생 곳곳에 잠복해 있는 그 모든 불투명성이
공포가 아니라 우수로 느껴지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14.

그리고 저 메모를 썼을 때, 데이브 브루벡 쿼텟 Dave Brubeck Quartet의 <후지야마 Fujiyama>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오래된 메모 끝에 메모가 붙어있다. 메모 안에 메모 안에 메모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15.    

그렇다. 계절이 바뀔 때, 특히나 내가 사는 도시가 지구의 기울어진 축으로 지구의 공전으로 좀 더 북쪽으로 향할 때, 그래서 가을을 몰고 오는 서늘하고도 상쾌한 바람이 여름을 내몰면, 나는 이 노래를 듣곤 한다.

이 노래는 내 인생에서 어느 밤, 지방도시의 어느 누 추한 동네, 어느 볼품없는 개천가, 이제 막 물이 올라 연둣빛으로 검은 밤을 붓질하던 버드나무 아래, 젊은 아버지 등에 업혀 있던 어린 나의 뺨을 어루만지던 봄바람과 어떤 정서적 등가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 그때의 검은 밤, 연둣빛으로 투명한 봄바람은 이 노래와 비슷했다.


16.

황금개를 만난 그 이듬해 나는 이 노래를 알게 되었다. 이 노래를 내게 알려준 이는 ‘우로’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였다.


17.

이처럼 내가 알고 있는 노래들은 우연히도 스스로 알아낸 것도 있지만 대체로 누군가 나에게 건넨 것들이다. 그들이 내게 건넨 노래들은 내 삶이라는 볼품없는 책자의 어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 모서리가 접힌 작은 삼각형과도 같아서, 예기치 않게 그때의 일들을 문득 내 앞에 펼쳐 보이곤 한다.


18.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을 만들고 황금개를 만난 그다음 해 봄, 빈곤과 굶주림 끝에 나는 정동길에 있는 한 전시기획대행사에 계약직으로 다니게 되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사람은 A선배를 통해 알게 된 모음에 있던 또 다른 선배였다. 그 선배에게 감사를. 그리고 공장에서 일당 노동자로 일하던 나를 흔쾌히 뽑아준 그때의 사장님께도 감사를.


19. 

회사 사무실에서 만난 우로의 첫인상은 사실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는 4월부터 출근해 있었고 팀장이라는 그는 한 달 후쯤 들어왔다. 그 역시 계약직이었다. 그는 나보다 네 살 많았는데 내가 먼저 출근했다는 사실을 꽤나 의식하는 듯, 사실은 자기가 먼저 연락을 받았으니 자기가 먼저 들어온 셈이라는, 나로서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에 꽤나 집착했다.


20.

놀랍게도 그는 온갖 꾀를 내어 일을 하나도 하지 않으려 했고, 그건 그때 같이 들어왔던 다른 계약직 편집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표가 참석한 업무회의시간에 온갖 사정과 핑계를 동원해 나에게 모두 일을 떠넘겼다. 팀장 직함을 달고 있던 우로는 공정한 업무분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 역시 자신이 맡은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 일들은 당구공처럼 이런저런 단단한 벽에 부딪친 후, 다시 나라는 구멍으로 흘러들었다. 고무마개를 잃어버린 욕조에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의 영혼을 지닌 세면대에 물을 흘리듯이, 넘치는 법도 없이 그 모든 일들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그러나 나는 불만이 없었다. 지난 몇 년이 너무 고달팠기 때문이다. 밤을 새우는 일이 많이 힘들었지만, 일이 많은 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다. 그걸로 족했다.


21.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로는 별 할 일 없이 업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때때로 그가 하품을 하거나 지루해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업무시간에 늘 작은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란 컴퓨터로 자신이 듣던 노래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거나, 새로운 노래를 찾거나 저녁을 해결할 적당한 식당을 물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권태와 나태와 싸우느라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그의 등뒤 창밖으로 태양이 저물었다. 그리고 태양의 운행에 맞춰 우로의 둥근 머리 역시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서서히 해넘이를 시작했다. 모니터 윗부분이 적절한 지평선이 되어주었고 서서히 잠기는 그의 머리 뒤로 눈부신 황혼 빛이 일렁였다.


22.

그러나 여섯 시 정각이 되면 그는 갑자기 태양과 함께하기를 멈추고 생기에 넘쳐 반짝 거리는 눈을 하고는 내 자리로 찾아왔다.

“한잔 해야지?”

그를 알고 지낸 거의 15년의 세월, 내가 그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23.   

그렇게 그런 그와 나는 친해졌다.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실무에 대한 지식도 이해도 없었으나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정치력이 있었다. 그걸로도 그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란 족했다. 그런 그는 어쩐 일인지 꽤나 나를 아꼈고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술친구가 되었고, 그 역시 나에게 그러했다.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탔고 사람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좋아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사람을 가렸다. 어쨌든 나는 내 의도와 염원과는 무관하게 그의 시험을 통과해 그의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야근이 있는 날에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술 약속을 잡았다. 그렇지 못한 날에는 야근을 하는 내 옆에서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내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일초라도 빨리 술집에 가고 싶은 그는 나에게 말했다.

“한잔 해야지?”


24.

‘우로’는 내가 만나본 가장 성실한 술꾼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코케인’이란 이름의 단골 술집을 찾았다. 그때 코케인은 대학로 어느 한 구석에 있었다. 낡고 오래된 작은 건물 이층이었고, 창밖으로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그 비좁은 술집에서 무뚝뚝한 사장이 틀어주는 노래를 듣거나,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해 가며 항상 만취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술에 취해도 잠을 자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우로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셔대서인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눈을 감고 잠에 빠져 들곤 했다. 마치 자정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그리고 어디론가 황급히 떠나버린 그의 부주의한 영혼은 언제나 그의 육신을 챙겨 가지 못했다. 마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인 양.


25. 

우로는 술과 음악과 재미없는 농담과 술집과 혼연일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느 순간 술집과 그를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문득 살펴보면 술에 취해 엎드려 잠든 그는 누군가 엎지른 술처럼 보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바 테이블에 나있는 나뭇결무늬로 스며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야근을 하고 늦은 밤 술집을 찾으면, 그는 때때로 벽 쪽에 가까운 바 테이블 끝 그의 지정석에서 앉아 술에 취한 채 그의 불룩한 술배에 의지하여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가 야근하는 나를 대신할 그 누구와도 술 약속을 잡지 못한 날의 풍경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술집 한 구석에 놓여있던,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 장식이나 가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면, 그는 흡사 과거에 살았던 어떤 전설적인 술꾼은 그 스스로를 기리는 동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이 그의 옆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술을 마시며 떠들다 자리를 떠도 그는 그대로 오랜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술집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는 그랬다.

분명 한낮에 그와 사무실에 같이 있었음에도, 내가 낮에 본 것은 그의 환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싶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떤 마법에라도 걸린 듯 어제도 엊그제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술에 취해 잠들었고, 또 내일이 와도 이렇게 잠들어 있을 테니까.


26.   

언제나 그다음 날 할 일이 산더미였으므로 나는 적당히 취하면 집에 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잠든 덩치가 산더미인 그를 깨우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어깨를 흔들다 보면 한두 시간이 금세 또 지나갔다. 언제나 그러했다. 한참을 지나 마법에서 깨어난 우로의 얼굴은 목욕탕에라도 다녀온 듯 말끔했다. 나는 너무도 피로하여 그와 빨리 헤어져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는 택시 잡을 생각은 안 하고 길거리에 나를 붙잡아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잔 해야지?”


27.

또다시 가을이 왔다. 어느 날이었다. 술집 창 밖 은행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우리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후지야마>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의 어느 작은 소도시에 있는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같이 후지산을 바라보며 술 한잔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그 여행 계획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물론 누구도 실행에 나서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갑갑한 현실에서 여행에 대한 상상과 이야기만으로도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그날 밤은 어쩐지 아늑했다. 


28.

그렇다. 계절이 바뀔 때, 특히나 내가 사는 도시가 좀 더 지구의 기울어진 축으로 인해 북쪽으로 향할 때, 그래서 가을을 몰고 오는 서늘하고도 상쾌한 바람이 여름을 내몰면, 나는 이 노래를 듣곤 한다. 그러면 이 노래는 모서리가 삼각형으로 접힌 책장이 되어 그때의 일들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 양 지금 이곳으로, 내 앞으로 불러낸다.

서른 초반 그 어느 해 가을밤, 플라타너스 낙엽이며 노란 은행 잎이며 검은 비닐봉지며 구겨진 신청곡 쪽지며 죽은 아버지며 재채기며 콧물이며 가짜 크리스마스트리며 반짝이는 눈물이며 엎지른 술이며 길고양이들이며 밤하늘 구름이며 참치캔이며 코케인란 이름의 술집이며 그 술집의 무뚝뚝한 사장이며 등등과 함께 세월 저편으로, 부주의하게도 고무마개를 잃어버린 욕조의 배수구로 사라져 버린 그와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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