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이란 홍수는 우리 집을 아랫동네에서 고갯길 위로 올려놓았다.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아라랏산 꼭대기에 정착했듯이.
이사 온 집 맞은편 야트막한 산의 비탈에는 작은 포도밭이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에서 달콤한 포도 냄새가 났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포도 냄새가 배어있는 그 안개를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노래 <스카보로 페어>랑 종종 혼동하곤 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처럼 그때의 안개가 자욱하다.
2.
일이 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학교에 가끔 등본을 제출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살았던 집들의 목록이 가난처럼 범람했다. 우리 식구는 늘 같은 동네에서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리고 그 동네의 경계랄 수 있는 그 고갯길가로 이사했을 때, 나는 국민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조용히 사춘기를 맞이했다.
3.
보이지 않은 안개도 있었다. 장판 아래 시멘트로 굳힌 방바닥에는 미세한 균열이 있었다. 연탄불을 땔수록 건조해진 시멘트의 균열은 더욱 교묘해졌다. 그 가늘고도 완만한 실금으로 새어든 연탄가스는 잠자리로 파고들곤 했다. 이전에 살던 집들도, 새로이 이사 온 집도 모두 그랬다. 연탄가스에 중독돼도 병원 응급실을 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건네준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을 조금씩 삼키며, 그저 차갑고 시린 겨울 공기에 몸을 맡길 뿐.
4.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산소. 헤모글로빈. 포도. 안개. 부뚜막의 고양이. 현기증. 메스꺼움. 기억 상실. 겨울 하늘. 엄마. 아빠. 누나. 중간고사. 성적표. 육성회비. 한없이 투명한 분자식. 스카보로 시장에 가시나요?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그리고 타임. 그곳에 사는 어떤 이에게 전해주세요. 한때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노라고.
5.
국민학교 시절, 두 명의 급우가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났다. 사고는 아니었다. 그들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일가족이 모두 죽었다. 그렇게 죽은 아이의 책상에는 국화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단 하루만,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 국화꽃은 사라졌다. 세상은 떠나간 존재에 대한 기나긴 애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6.
한 명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였다. 고갯길 너머에서 ‘별천지’라는 이름의 식당을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들으면 눈앞에 별들이 글썽이는 듯했다. 둘 중 그 한 명을 이렇게라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 별빛 가득한 식당 이름 때문이다. 나머지 한 명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가난은 존재를 숨죽이게 한다.
7.
고갯마루에서 그 아이가 죽은, 별천지라는 식당이 있었다고 하는, 건너 마을을 내려다보곤 했다. 또 다른 어떤 사정이 있을 집들이 드문 드문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암흑 속에 드문 드문 박혀 빛나는 석탄 입자처럼.
8.
고개 아래 마을의 사정도 변변치 않았지만, 고개 너머에는 더 가난한 이들이 살았다. 뾰족산을 넘으면 거짓말 같게도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는 마을도 있었다. 말이 산이지, 그저 봉우리가 제법 뾰족한 모양의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몇십 년 전의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비현실적인지 마치 시간을 거슬러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신통력 있는 어느 할머니에게 점을 보러 가곤 했는데, 나는 한두 번 따라간 적이 있다. 할머니는 촛불을 켜놓고 검은 밤하늘 같은 네모난 김에 하얀 소금을 뿌리고, 석쇠 불에 구워 반찬으로 내놓곤 하셨다. 겨울밤처럼 검은 김.
9.
고개 너머에도 아이들은 살았다. 아이들은 고개를 너머 등교했다. 그 아이들 중 어느 한 명을 기억한다. 국민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무더운 날이다. 나른한 오후의 교실 풍경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 여자 아이가 맨 뒷줄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싸구려 인견으로 만든, 살이 비치는 어른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또래보다 조숙했는지, 블라우스에 언뜻 하얀 브래지어가 비춰 보인다. 아이는 단 한 번도 도시락을 싸 온 적이 없었다. 가난과 성징은 사춘기의 수치로 하나의 짝을 이룬다. 감히 그 아이를 놀리는 또래는 아무도 없었다.
10.
너의 불행은 언제나 또 다른, 그리고 더 큰 불행에 의해 반박된다. 그러니 너는 침묵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11.
연탄가스 중독으로 고생한 그 겨울이 지나, 이듬해 여름 장마철의 일이었다. 장맛비로 불어난 물에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절반이 부서져 떠내려갔다. 누나들과 내가 지내던, 창문으로 건너편 포도밭이 보이는 방은 남았고, 부모님이 쓰시던 작은 방과 부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부모님이 쓰시던 작은 방 아래에는 커다란 하수관이 지나고 있었다. 집 절반이 떠내려가고서야 안 사실이다. 술주정뱅이 아빠도, 가엾은 엄마도 다행히 떠내려가진 않았다.
숨기고 싶던, 구차하기 그지없던 우리 가족의 세간살이는 그렇게 또래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등굣길, 벌거벗겨진 가난에서 나와 아이들과 마주치는 일이 두려웠다.
12.
보상은 주인집에게만 주어졌다.
13.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내 등교 시간에 맞춰 집을 나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대화하고 싶으셨던 건지, 아니면 그저 같이 가고 싶으셨던 건지 알 수 없다. 나에겐 그런 문제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비탈길의 각도에 맞춰 자전거의 속도를 줄이며 나와 나란히 가려고 하셨다. 아버지가 타고 있는, 어디선가 공짜로 얻었을 것이 분명한 출퇴근용 고물 자전거는 청소년용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자전거가 어른용이었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외면하고 그 고물 자전거를 뿌리치려 했다.
14.
작은 포도밭이 있는 비탈의 맞은편, 그러니까 우리 집이 등지고 있던 산을 아버지와 찾은 기억이 있다. 엄마가 결핵을 앓고 있던 그 동네에서 이곳 샘골이라 불리던, 대전시 동구 천동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일을 쉬는 날이면 깨끗한 셔츠를 차려입으시고 나를 자전거에 태워 이 야트막한 야산을 찾곤 하셨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랬다. 아버지의 손을 잡거나 혹은 등에 업혀 산을 조금 오르면, 커다란 구덩이가 두 개 있는 조용한 장소가 나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나를 옆에 앉혀놓고는 구슬프게 하모니카를 부셨다.
15.
얼마 전 이웃집에서 누군가 하모니카를 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그때 그 봄바람과 아버지가 떠올랐다.
16.
아버지가 하모니카를 부시던 그 산에 있던 두 개의 구덩이는 그 규모가 제법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6.25 전쟁 때 폭탄이 터져 생긴 거라고 했다. 사실, 그랬거나 말거나 이긴 하다. 조각보처럼 이것저것이 이질적이면서도 이물감 없이 이어져 있는 그 모든 풍경은 이제 눈부신 세월에 매몰되어 그 어떤 비밀도 누설되지 않는 수직으로 완고한 아파트들이 되었으니까.
17.
고갯마루로 올라왔지만, 그 고개 너머로 이사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집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명 더 가난해지고 있었다. 일을 나가신 엄마는 어둑어둑해져서야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학교에서 먼저 돌아와 있던 나는 가끔 엄마와 함께 언덕 너머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쌀집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 힘이 제법 생긴 나는 쌀 한 말을 들고 엄마와 함께 집을 향해 다시 언덕을 올랐다. 외상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외상 쌀을 먹을 수 없을 때면, 칼국수며 수제비를 해 먹었다. 그것들 역시 외상이었다. 나는 큰 불만도 근심도 없었다.
18.
아버지가 벌어오는 일당은 형편이 없었다. 퇴근한 아버지는 술 냄새를 후욱 풍기며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내 놓으셨다. 액수는 그때그때 달랐다. 어떨 때는 주머니에서 단 한 푼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비싼 술집에서 돈을 탕진하셨을 리는 없었다. 술주정뱅이에 가정폭력범일지언정 결코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밤을 새워가며 식구들을 괴롭혔지만, 새벽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끌고 일터로 나가셨다. 그 불면과 폭력의 밤만 아니라면 그저 성실한 노동자셨다. 어느 한 날은 유독한 액체를 짊어지다 어깨에 온통 화상을 입고는 끙끙 앓으며 돌아오신 적도 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고생하며 일하시는데 가져오는 돈은 고작 이 정도일까?
19.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아버지 입에서는 소주 냄새가 났다. 그 말이 나에게 한 것인지, 엄마에게 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식구 모두에게 들으라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물건을 빼돌리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 내뱉는 폭력적이고도 의미 없는 말이 아닌, 정상인이 할 법한 말이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평가는커녕, 맨 정신에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아버지여서인지 말의 내용보다는 말을 했다는 그 자체가 의외였다.
20.
어느 날, 컴컴한 저녁이었다.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불러 모으셨다. 우리는 침침한 전등불빛 아래 세상이 금지한 종교에서 정한 예배를 드리듯 그렇게 모여 앉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영세민 신청을 할까 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누나들도 나도 그 자리에서 반대했다. 영세민이란 ‘자격’ 그리고 ‘칭호’. 세상이 추구하는 평범이라는 어떤 건전한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탈락했음에 대한 인증. 그 이상으로부터의 불쾌한 격리이자 달갑지만은 않은 보호. 그때는 이런 생각에 미처 이르지 못했지만, 누나들도 나도 어떤 동물적인 직감으로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엄마는 어쩐 일인지 의외로 안도하셨다. 어쩌면 가난이란 벼랑 끝에 내몰린 엄마가 좀 더 버티는데, 단지 우리의 확인이 필요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21.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근심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철없는 사춘기 소년으로서 나는 현실과 안개와 포도 냄새와 낯선 외국어로 된 노래를 뒤섞었다. 굳이 내색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 가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무시했고 혼동했고 쓸모없으나 아름다운 것을 꿈꾸었다.
22.
어느 깊은 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간 어머니를 찾아 나선 골목길에서도 별을 쳐다보며 헤매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때 내 뒤에서 걸어오던 어느 젊은 연인이 키득대며 이렇게 속삭이는 걸 들었다.
"어머, 쟤, 미쳤나 봐."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