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중턱에 있던 고등학교 교정은 나름대로 정취와 풍경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는 도시락을 먹고 아무도 없는 스탠드에 나와 앉아 있거나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농구를 하거나 공부를 했다.
2.
차가운 콘크리트 스탠드에 앉아 바라보면 나즈막한 회색 도시가 펼쳐져 있고 그 경계에는 청회색의 산들이 있었다. 탁 트인 경치지만 그때는 그 풍경이 갑갑했다. 이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운동장을 가로질러 담벼락을 따라 줄지어 서있는 은행나무들을 보는 것은 좋았다. 가을이 오면 은행나무는 눈부시도록 샛노래졌다. 차가운 바람이 그 커다랗고 투명한 손으로 차례로 나무를 훑으면 작고도 빛나는 노란 날개를 단 수많은 새들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3.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마이마이’로 음악을 들었다. 오래전 삼성전자가 만든 휴대용 카세프 플레이어다. 이어폰으로도, 플레이어 한쪽 면에 있는 작은 스피커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4.
존 레넌(John Lennon), 스티브 포버츠(Steve Forbert),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 프로콜 하룸(Procol Harum), 비지스(BeeGees)… 그런 가수나 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그때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당시 방학 때마다 ‘올-타임 리퀘스트 100(All Time request 100)’이라는 특집 방송이 있었다. 그 목록에 올릴 법한 노래들이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취향이었다.
5.
그때 유행했던 최신 가요는 듣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버지의 것이었던 흘러간 옛 가요들이 수록되어 있던 테이프를 즐겨 들었다.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까지 트로트 명곡을 원래 부른 가수 원곡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6.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노래는 고운봉 선생이 부른 <선창>이란 노래였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대폿집에서 젓가락 반주에 흔히 불리던 노래.
울지도 웃지도 않았던, 표정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일생.
7.
첫째 누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해 취업하고, 둘째 누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해 지방은행에 취업하자 집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8.
둘째 누나는 좋은 직장을 잡았지만 첫째 누나는 그렇지 못했다. 집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자리는 전화가 있던 주인집 딸에게 돌아갔다.
9.
용돈을 모아 한 달에 한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대전의 도심이자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대흥동에 갔다. 어느 가을날, 대흥동에 가는 버스 안에서 시카고가 부른 <당신이 나를 떠난다면(If you leave me now)>를 듣고 있었다. 햇살도 바람도 아름다운 날이었다.
10.
대학에 들어가서는 너바나(Nirvana)나 라디오헤드(Radiohead) 같은, 당시 큰 인기를 끌던 개러지록이나 브릿팝을 많이 들었다. 그건 내 젊은 영혼의 국가였다.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와 같은,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나라에 의해 금지되었던 음반들에 심취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노래들은 차츰 즐겨 듣지 않게 되었다.
11.
어느 가을날, 버스 안에서 듣고 있던 시카고의 그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쩌다 문득 그 노래를 듣게 되면 나는 한치 오차도 없이 버스에 타고 있던 그 고등학생이 되어버린다.
12.
나에게 ‘마이마이’가 생긴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세 아이가 모두 중고등학생이었으니 어쩌면 부모님이 돈에 가장 허덕이든 시절이 아닐까 싶다. 나는 대체로 평범한 아이였다. 눈에 띌만한 아이가 아이였다. 말썽을 부린 적도 없고 성적도 반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그저 그런 아이였다.
그러던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많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28등을 했으니 반에서 거의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성적을 받아 든 엄마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엄마가 나에게 제안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엄마가 마이마이 사줄게.”
13.
중간고사에서 2등을 했다. 물론 반에서였다. 엄마는 약속대로 마이마이를 사주셨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기말고사에서는 반에서 1등을 했다. 다른 선물은 없었다. 나는 마이마이로 족했다.
14.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친구들과는 적당히 어울렸다. 혼자 감상에 젖거나 이런저런 몽상으로 도피하는 걸 더 좋아했다. 그 시절, 진정 내 친구라 할 수 있는 건 ‘마이마이’라는 이름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15.
국민학교 시절, 새 학년은 언제나 숨기고 싶은 집 사정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투명한 공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지금 사는 집이 자기 집인 사람 손 들어.”
“그럼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 손 들어.”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 들어.”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 손 들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손을 드는 아이와 그렇지 못하는 아이, 팔이 귀가 닿도록 번쩍 들며 고개를 당당히 든 아이와 고개를 숙인 아이가 있었다.
16.
가난했음에도 가난의 고통을 몰랐던 건, 엄마의 사랑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17.
어쩌다 한 두 번, 아내에게 또 동갑내기 블루먼데이 사장 친구에게 술에 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술과 음악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18.
생각해 보니, 엄마는 그때 그 허름한 전파상에서 내가 삶을 견디고 또 즐길 수 있도록 어떤 신비로운 장치를 건넸던 거다. 그래, 그렇다. 그런 셈이다.
19.
중학교 때부터는 새 학년 시작과 함께 선생님과 짧은 개별 면담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한다. 아이들을 편견 없이 그리고 차별 없이 대하는 좋은 선생님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선생도 있었다.
20.
특히 고등학교 2, 3학년 담임은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최악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저 그런 사립학교였다. 담임이 학교재단의 이사장 사촌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른바 ‘백’으로 선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국민윤리가 담당 과목이었는데, 학생인 내가 보기에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21.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처음 교실에서 그와 면담했을 때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뭐 하시고?”
“**정기화물회사에 다니십니다.”
그는 서류에 뭔가를 적으며 물었다.
“아, 그럼 소장이신가?”
“아뇨, 거기서 하역일을 하십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곤 다시 서류에 뭔가를 끄적였다. 흐지부지 면담이 끝났다.
22.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때때로 일어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마이마이’가 있었으니까.
23.
어느덧 입시 철이었다. 문제가 있었다. 배치고사 성적에 맞게 학교를 지원하려 했는데 담임이 입시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너의 성적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밤에 아버지를 말리고 학교에서는 잠만 잤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는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는 배치고사 성적이 한참 미달하더라도 원하는 학교 입학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있었다. 같은 반 아이들 이야기다. 상담은커녕 상대도 잘 안 해주려는 담임의 태도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입시 원서 마감일이 다가오자 나는 공장에서 일하고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10만 원을 하얀 봉투에 넣어 학교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24.
그때 나는 나쁜 어른들이 굴리는 세상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25.
입시 결과, 우리 반에서 대학에 합격한 친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반의 사분의일에도 채 미치지 않는 대학 진학률이었다. 그간 담임의 태도에 주눅 들고 잔뜩 겁을 먹은 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대학에 지원했다. 같은 반 성적 상위권 학생 중 내가 유일한 합격자였다.
26.
그렇게 대학에 들어왔고 배우고 싶지 않던 술을 배웠으며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깊은 밤과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만 나온 누나들이 취직하여 부모를 도와 나를 뒷바라지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이 미안하면 미안할수록 나는 쓸모없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니까 술, 음악, 문학이며 철학 책과 같은 것들.
27.
“우리의 밤은 고독으로 연대되어 있다.”
28.
술에 취한 어느 날 밤, A선배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라며 나에게 일러주었다. A선배는 앞서 공개한 이야기 <내 인생의 마요네즈 레시피> 전편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이 말이 떠올라 출처를 확인하려고 책을 뒤지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인공지능에 기대어 보았지만 명쾌한 답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다. 그날도 그랬지만 그간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러니 내가 떠들고 있는 이 모든 이야기들처럼 저 문장 역시 불완전한 추억이다.
29.
라이너 마리아 릴케든 니체든, 혹은 마치 유전 정보처럼 인류의 고독과 함께 잠복해 내려오다 우연히 나의 망상에서 발현된 말이든, 나는 그 말에 오래도록 공감해 왔다. 혼자 듣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나만 안다거나 세상에서 그 노래를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노래가 나만의 소유일 수는 없듯이. 밤의 사유와 몽상로부터 당신의 것이기도 한 고독을 나는 함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며 니체며 카프카며, 버지니아 울프와 토머스 울프며, 고흐며 뭉크며, 핑크 플로이드며 데이비드 보위며 하는 그들의 고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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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이안 헌터(Ian Hunter)의 동명의 곡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