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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written text Aug 07. 2024

내 인생의 마요네즈 레시피 01

1.

유머 감각은 삶을 견디는 데 중요하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준 이들이 몇 있다. 굳이 꼽아보자면 세 명이다. 그들은 내 친구이자 삶의 은인이다. 그런 이들을 살면서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2.

그들 세 명 중 두 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예정이다. 나머지 한 명은 이런저런 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할 것이다. 따로 글로 쓰려고 하는 두 사람은 이제 내 곁에서, 내 삶에서 멀어져 버렸기도 하다. 이들은 각각 내 이십 대, 삼십 대, 그리고 사십 대 시절에 한 명씩 자리하고 있다.


3.

내게는 이십대라는 삶의 공간, 삼십대라는 삶의 공간, 사십대라는 삶의 공간을 잇는 하얗고 긴 회랑이 있다. 눈부시고 뜨거운 생의 태양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어준 그곳, 내가 지나쳐온 그곳에 그들이 서있다. 그리고 어디쯤인가에서 나는 그들과 만나 악수하고 대화하고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그림자를 스쳐 지나와 오늘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긴 회랑의 또 다른 어디쯤인가에서 지금의 아내와 고양이를 만나고 있다. 이들 또한 제법 유머 감각이 있는 존재들이다.


4.

사교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살면서 그들 외에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또 지금도 여럿 있다. 감사할 일이다. 한편 나를 증오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도 몇은 있었던 듯하다. 사실 며칠에 걸쳐 그들에 대한 글을 쓰려했었다. 그러나 모두 쓸모없는 일이었다. 내 삶이 어째서 훼손되었는가에 골몰하여 내 삶에 있어서의 악한들과 불한당들을 굳이 재소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들을 기억해 내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렇게 깨달았다. 그들을 다시 떠올리는 건 다시금 나를 소모하는 일이다. 내 생의 악당들이 선사한 악몽이 잠자리에까지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5.

A선배는 대학시절,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후에 알게 되었다. 원래는 그 선배의 동생을 먼저 알게 되었다. 둘은 자매였고, 복학생이었던 나는 A선배의 동생과 몇몇 수업을 같이 들었다. 후배는 어느 날 자신의 언니와 내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선배란 언제나 어려운 존재라서, 처음에는 만나기를 망설였다가 어찌하여 소개를 받고 인사하게 되었다.


6.

지금 떠올려보니, A선배의 동생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누구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하는데, 그가 닮았다고 한 인물은 꽤나 의외였다. 그 인물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이레이저 헤드>에 나오는 주인공이었다. 특히나 영화 포스터 속 그 인물과 내가 닮았다는 거였는데, 내 머리가 다소 긴 곱슬머리인 점을 제외하면 나로서는 도통 그 인물과 어째서 닮았는지 납득은 되지 않았다.


7.

그렇게까지 기괴한 인물이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시절의 나는 좀 이상한 복학생이긴 했다. 군대를 다녀온 동기들은 당시 새 학기가 되자마자 취업 준비에 열심이었다. 1학년 때 그들의 그 방탕한 생활이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청산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그때 그들은 모두 뚜렷한 생의 목표가 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 평범한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여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 대체로 그들의 목표는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겉돌았다. 그들 무리에 섞이지 못했다. 나는 그들과 뒤섞여 마요네즈가 될 수 없는, 조금은 시큰둥하고 이상한 청년이었다. 몇몇은 그런 나에게 잘 대해줬고, 몇몇은 그런 나를 불편해했다.


8.

군대를 다녀온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그게 내가 이상한 존재가 된 연유라고 나는 그렇게 여긴다. 어쩌면 술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군대에서 오랫동안 복용한 천식약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비뚤어졌다.


9.   

원래는 아버지에 대한 지긋지긋한 기억 때문에 술을 배울 생각이 없었다. 신입생 때 고등학교 동문회 모임에 잘못 찾아간 것이 문제였다. 그곳은 매우 안 좋은 전통을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었다. 폭력이 있었고 술이 강제되었다. 며칠을 술병을 앓으며 멈추지 않는 회전목마를 타고나서 나는 술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었다. 뒤늦은 사춘기가 왔다. 우리 아버지 역시 내가 어릴 적 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때 아버지에게도 부작용이 있었다. 아버지는 폭력 가장이 되었다. 그 당시 어쩌면, 아버지 역시 뒤늦은 사춘기를 겪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10.

마요네즈를 망치는 레시피는 이렇다.


1) 달걀노른자를 흰자와 잘 분리해 낸다.

2) 여기에 소금과 레몬즙 약간, 그리고 적당한 양의 식용유를 넣는다.

3) 대학시절,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시큰둥해있는 한 청년을 넣는다.

4) 자, 이제 잘 저어주면 마요네즈를 망치게 된다.


11.

1999년, 세기말 미국 인디밴드 마그네틱 필즈(Magnetic Fields)는 아래와 같은 가사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 노래 또한 마요네즈를 만드는 데 있어 부적절한 이물질에 관한 노래다. 참고로 나는 마그네틱 필즈가 부른 원곡보다, 내가 지나쳐온 삶의 회랑에서 현재로서는 가장 최근의 위치에 서있는 ‘블루먼데이’가 나에게 알려준 존 요코(John Yoke)가 부른 노래를 더 좋아한다. 부른 이의 목소리가 원곡보다 훨씬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12.

‘네 비뚤어진 관점이 좋아, 마이크

질문들로 추켜올린 네 눈썹도 좋아

네가 뭘 원하는지 분명히 했으니

이제 말해주는 것이 좋겠군

나는 아침 일찍 떠날 거야

내년까진 돌아오지 않을 거야

키스해 달라고 입을 오므리는데

대신 그 입에다 맥주나 갖다 대시지’


13.

단과대 건물 앞 벤치에서 A선배를 소개받고 인사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레이저 헤드>의 주인공 헨리 스펜서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었지만 포스터는 알고 있었다. A선배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14.   

멋 모르던 신입생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었다.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한 죄의식과 부채감으로 대학시절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누나들의 꿈을 짓밟고,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을 딛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출세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겠지만, 그래서 더욱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동생이 되어야 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교정을 거니는 수많은 여학생을 보면, 가난한 집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누나들 얼굴이 눈에 떠올랐고 그 얼굴들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전쟁이 임박한 도시의 철조망 너머로 서둘러 철수하는 외교관에게 건네어진 어린아이였다. 평화와 낭만이 넘치는 곳으로 홀로 이주했으나, 전쟁과 같은 현실에 가족들은 내버려진 채였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15.

그런 나에게 A선배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A선배를 보면 누나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국기 한복판에 있는 태양의 노란 얼굴을 닮은 그는 엄청난 애연가였고 엄청난 양의 맥주와 문어 다리를 사랑했다.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그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그는 내가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지적인 인물이고 뛰어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다.


16.

또한 A선배는 나에게 있어 정신병원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정신병원 그 자체이자, 스스로가 그 정신병원의 의사이지 간호사였다. 환자에게 마음의 준비 따위를 허락하지 않는 매우 거침없는 손길의 전문가였다. 그의 드높은 지성과 의료관에 따르면 세상이든 인간이든 웃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부여한 질병 분류 코드는 ‘고뇌하는 청년’이란 것이었고, 그가 보기에 ‘고뇌하는 청년’은 꽤나 웃긴 구석이 있는 존재였다.


17.

어느 날, 오전이었다. 나는 밤새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마치 <이레이저 헤드>의 등장인물처럼. 물론 그 영화를 지금껏 보지 못했지만. 나는 이웃에 있던 A선배 집을 찾았다.


18.

그때의 증세는 이러했다. 갑자기 ‘어머니’라는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휘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어떤 의미라든가 가치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안에 있는 언어 체계 혹은 의미의 구조물들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린 것만 같고 이 텅 빈 공허에서 나 역시 곧 죽음에 이를 것만 같았다. 외롭고 불안했다.


19.    

A선배는 오전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 앞 책상에 있었다. 반가사유상처럼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채 번역에 열중해 있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푸른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금 그 풍경을 다시 그려보자니 그때 절을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오른손은 수북한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낸 후 재빨리 담배를 자신의 입에 물린 후 왼손과 함께 자판을 쉴 새 없이 두드려 댔다. 그의 책상은 서류뭉치와 번역원고와 책들로 어지러웠다.


A선배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전문의를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 있던 내게 말했다.

“고뇌하는 청년, 박군 왔어?!!”

그러고는 다시 번역에 열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여전히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티고뇌여! 으하하핫”


20.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유명한 오이디푸스가 그의 아버지이자 오빠이다. 무척 어지러운 족보이고 저주받은 운명이다. 그저 그런 언어유희였고 시시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앓고 있는 이 진지한 질병에 가벼운 우스개에 불과하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21.

이 정도 수준의 농담은 물론 A선배의 탁월한 유머 감각과 농담 구사 능력을 대표할 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여러 가지 특정한 상황에서 배꼽이 빠지도록 웃은 적이 많다. 하지만 그 특정한 상황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나는 세월에 휩쓸린, 네덜란드 소년으로 가장한 어설픈 나이의 중년 아저씨니까.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그날의 기억은 선명한 채로 남았다.


22.

마요네즈가 되지 못할 것만 같은 내 인생, 어디선가 어긋나버린 마음, 불투명 창문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오전 햇살 속에서 왈츠를 추는 먼지들. 뒤늦은 사춘기이든 우울증이든 생의 감각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쓸모없는 젊은이 옆에서 그가 보여준 적절한 무관심이란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 별도 표기가 없는 한, 영어 원문이나 영역문의 번역은 필자가 했음을 밝힙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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