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형상

형상은 빚는 게 아니다. 불쑥 흙에서 솟아난다. 거짓말처럼.

by 은이은


어떤 연유로, 나의 집에는 식물이 많다. 겨울에도 초록이 가득하다.


스스로 시작한 취미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자꾸 많아지는 녀석들을 대접할 화분 혹은 화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그것이 도자기를 시작한 첫 번째 이유였다.


우리 집은 서울의 경계에서 간선도로를 타고 30분은 가야 나온다. 그래서, 가까이에 없는 것이 많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것도 많다. 동사무소까지 10미터, 데크가 깔린 뒷산 산책로 20미터, 스타벅스는 30미터, 동네 마트는 40미터, 도자기 빚는 공방은 약 50미터 거리에 있다. 가마까지 갖춘 공방이 가까이 있다는 지정학적 강점. 그것이 내가 도자기를 빚게 된 두 번째 이유다.


진작 발을 들여놓을 뻔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이던 그 시기, 예약까지 했다가 주저앉았다. 아주 잊은 건 아니어서, 2024년 가을에 첫 수업을 받았다.


첫 번째 이유가 그러했기에, 첫날부터 내가 만든 건 그릇이 아니었다.


의도하고 시작했던 형태는 아니었는데, 바닥판을 놓고 코일 방식으로 흙을 쌓아 내 손에서 모양이 잡힌 건 새였다. 완성된 뒤, 푸른 잎을 깃처럼 세우게 될.


재벌구이를 마치고 가마에서 나온 녀석을 보니, 내가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신기했다.


새 모양 화병 (C) 은이은


그런데, 지금까지도 늘 그런 시작이다. 우연히 어떤 형상을 만나게 된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무엇을 만들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흙 안에는 항상 무엇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때로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덩어리 상태에서, 어떤 경우 만들어지다가. 작은 부분이 큰 부분을 지명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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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코끼리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건 주물럭거리며 반죽을 빚다가 코끼리의 머리와 코가 갑자기 나와버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몇 가지 흙의 종류를 안다.

얼굴, 꽃 선각 화분, 상어모양 향초 대 | 옹기토, 초벌 (C) 은이은


옹기토는 구우면 붉은색을 띤다. 재벌을 할 때 다른 흙과 유지해줘야 하는 온도가 달라서 재벌을 거치면 어떤 색이 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산백토는 초벌로 구우면 살색 같은 연한 분홍빛이 돈다. 동영토는 재벌을 거쳤을 때 매우 짙은 갈색이 된다. 분청토는 보랏빛을 띤 갈색으로 변한다. 물론 지금 얘기한 건 유약을 바르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공방 선생님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나쁜 학생임이 분명하다. 기존의 룰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도예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어떠한가? 충분히 즐겁지 아니한가?


나는 집에 흙을 사다 놓고 거의 매일, 그 새로운 형상들을 맞이했다. 그건 일종의 도피처 같은 거였다. 촉촉한 흙을 만지고 있으면 세상사의 시름과 고민, 걱정,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차차 얘기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인생을 배운다.


지난 연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든 것들을 선물했다. 내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값싼 선물은 아니라고 나는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게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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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좋은 일이 있었다. 경주에 있는 자주 가는 선물가게 사장님이 내가 만든 도자기들을 다른 선물들과 함께 진열해 주시기로 한 것이다. 노루와 개, 그리고 고래 등등이 진열대에 의젓하게 놓였다. 그동안 만들었던 많은 도자기들이 지금은 내게 없고 경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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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는 없지만, 내 영혼 한 조각을 품고 어디쯤에 가 있는 도자기들.


나는 창조자로서, 그들을 위해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주는 아닐지라도. 이 글은 그래서 쓴다.


그들이 내게서 비롯되었고 공장에서 막 찍어낸 그런 사물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주무르고 빚고 깎고 다듬어서 나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녀석들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누군가 그 작품들에 대해 친절하게 의미 부여를 하지는 않을 터이니, 나라도 해 주어야겠다고.


그래야 떠나보낸 나를 원망하지 않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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