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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09. 2021

운명을 달리한 김치냉장고

이제야 너의 소중함을 알았는데

어쩌다 TV 이야기가 나왔다.

“5년 동안 TV를 켠 적이 없는데 TV수신료 2,500원은 꼬박꼬박 내고 있어요. 한전에 전화해보니까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해 부과되는 거라고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라고 하더라고요. 관리사무소에서는 TV가 없는 게 확인이 되어야 수신료를 빼줄 수 있데요. 그런데 벽걸이 TV라 못 뜯고 있어요.”


내 말에 희남이 삼촌이 나섰다.

“내가 그거 전문 아니여. 내가 갖고 가면 되겄구만.”

“좀 오래된 거예요. 14년 전에 산 거...”

“뭔 소리여. 집에 있는 건 30년 된 거여.”

그 소리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설마 뒤에 불룩한 거예요?”

“맞어. 그거여.”     


희남이 삼촌은 뭔가 오래되고 낡은 물건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희남이 삼촌은 산에서 먹는 도시락을 항상 보자기에 싸오는데 그 보자기와 희남이 삼촌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면회 왔냐”라고 놀려도 삼촌은 보자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삼촌은 휴대폰을 사면 5년은 기본으로 쓰고 여기저기 뜯어져서 솜이 삐죽 나온 패딩을 잘도 입고 다녔다. 색이 바랜 개량 한복이 여름 등산복이라고 할 때부터 나는 삼촌이 보통 분이 아님을 예감했다.     


희남이 삼촌의 소개로 ‘사서 고생’ 팀에 합류한 지리산 아빠도 만만치 않았다. 산악회에서 22,000원짜리 겨울장갑을 공동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지리산 아빠는 자기 것은 다이소에서 천 원을 주고 산 거라고 했다. 22,000원이면 그 장갑을 22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지리산 아빠도 공동구매를 했는데 낄 때마다 별로 안 따뜻하며 투덜거려서 나는 속으로 22배만큼 따뜻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희남이 삼촌은 산행 때마다 뒤풀이 비용을 냈다. 십만 원이 넘게 나오는 돈을 연속 다섯 번을 냈을 때, 내가 억지로 내려고 하자 희남이 삼촌이 말했다.

“나는 얘들도 다 컸고 돈 들어갈 때가 없잖녀. 그러니까 내가 내도 돼.”

아무리 그래도 매번 도시락으로 소고기(보자기에 들어 있던 것)를 사 오고, 술까지 사면 부담이 될 것 같은데도 희남이 삼촌은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고 우겼다.     




김치냉장고 때문에 차단기가 떨어졌다. 전날 김치냉장고에서 윙윙하는 소리가 크게 났는데 그게 운명을 달리하려고 냈던 마지막 신음소리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 가망이 없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AS 신청을 했고, 몇 시간 후 기사님 두 분이 방문했다.   

  

“콤프레셔가 나갔어요.”

“교환하려면 얼마가 드나요?”

“30만 원인데 연식이 오래 된 거라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차라리 새 걸로 바꾸지 그래요?”     


결국 올 게 오고야 말았다. 14년을 함께 한 김치냉장고, 두 달 전에 청소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의 몸을 닦아준 거였다니. 12년간 살림을 남한테 맡기느라 몰랐던 너의 소중함을 이제야 느끼고 있던 참이었는데 느닷없는 이별이 찾아오다니. 항상 뭔가를 깨달을 때는 너무 늦어버리고 마는 것.

     

김치냉장고는 사지 않기로 했다. 돈도 없고 두 식구 사는데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될 것 같기도 해서다. 있다 없으면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당분간 그렇게 지내보기로 했다. 당장에 김치를 냉장고에 넣으니 냉장고가 꽉 차 버렸고 사과와 귤은 갈 곳을 잃고 다용도실로 자리를 잡았다.    

  

톡딜에 양파와 감자가 박스로 싸게 나와도 아, 김치냉장고가 없지, 하면서 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다 먹지 못하고 썩어서 버리는데 조금 비싸더라도 소량으로 자주 사면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쟁여놓을 곳이 없으니 뭘 살 궁리도 덜하게 돼서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 현천마을에서 밤재, 견두산, 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했다. 지리산 둘레길을 경유하는 코스라 간만에 여유로운 산행이었다. 현천마을 회관 앞에 주차를 하고 밤재로 걸어오는 7킬로미터의 길은 편백나무 숲과 산수유와 매화가 눈이 닿는 곳마다 피어있어서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도 백미로 꼽는 곳이다.


“벌써 머위가 나왔구만? 이따 고기랑 먹자고.”

희남이 삼촌이 머위, 갓, 봄동을 뜯었다.

폭신한 흙길을 걷다 보니 물 흐르는 소리도 청아한 개울이 나왔고 나는 점심에 먹을 쌈 거리를 물에다 씻었다. 그러느라 장갑을 벗어두고 오는 바람에 장갑을 찾으러 되돌아와야 했지만 고기쌈 맛만은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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