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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pr 05. 2021

집에서 무슨 옷을 입고 있나요?

집에서는 잠옷이면 충분했다. 잠만 자는 집에서 뭘 입어야 할지는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학원을 폐업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옷을 입고 하루 종일 있는 나 자신이 (한동안은 그렇게 지냈지만) 한심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아침의 잠옷 차림 그대로인 나를 보는 얼굴에서 존경과 애정은 고사하고 어쩐지 측은해하는 걸 발견한 뒤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레깅스와 탑을 입었다. 울퉁불퉁한 살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언제든 운동을 시작할 수도 있고, 내 몸의 완충제를 보면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입고만 있어도 운동이 되는 것 같은 심리적 효과는 덤이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입기에는 불편했다. 딸이 볼 때마다 운동하러 가냐고 물어봐서 귀찮기도 했다.


엄마가 두고 간 원피스 세벌을 찾았다. 주로 목욕탕에서 판매하는 찰랑거리는 천에 정체불명의 문양이 들어가 있는 냉장고 원피스. 에스닉, 집시, 보헤미안 디자인? 묘사하기 어려운 그 옷들은 엄마와 유난히 잘 어울렸고, 엄마를 가장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었다.


자신의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일까? 군인이 군복을 벗듯 자신을 상징하는 원피스를 두고 간 엄마의 의중이 뭘까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한번 입어봤다. 딸아이한테 웃겨줄 요량으로 세 벌 중에 엄마가 가장 자주 입던 원피스(검은색 바탕에 흰색의 기하학 문양이 있는)를 입고 딸을 기다렸다. 딸은 나를 보자마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그거 뭐야! 할머니 옷 왜 입고 있어. 그 옷 입으니까 엄마가 할머니 같다.”

“인자 오나? 손 씻고 퍼뜩 밥 무라. 시간 활용해가지고 책 보고 해야 되지, 휴대폰 보고 앉았고 그라만 큰사람 못 된다. 그쟈?"

(엄마 성대모사 중)


어라? 편하네? 당장에 나는 엄마 원피스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잘 때 입어도 되고, 잠깐 외출할 때(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택배 받기)도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만능 홈웨어. 가장 큰 매력은 입은 듯, 안 입은 듯한 그 묘한 느낌에 있었다. 세 벌이라 로테이션 주기가 딱 맞았다. 그러다 러닝머신으로 운동하려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의문이 들었다. 수고스럽게 레깅스 속에 몸을 집어넣어야 할 이유가 뭐람.


냉장고 원피스는 운동복 영역까지 진출했다. 원피스에 대한 나의 만족감은 점점 올라갔지만 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 왜 요즘 그 옷만 입어? 진짜 보기 싫어.”

“보기와 다르게 은근 중독성이 있어. 너도 한번 입어 볼래?”

딸은 기겁하며 사양했다.


엄마가 그 옷을 입고 있었을 때, 나는 그 옷밖에 없냐고, 할머니 같다고 했었다. 그 말은 엄마에게 왜 그렇게밖에 못 사느냐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그렇게 살도록 주저앉힌 게 나면서. 자식 키워서 결혼시키고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엄마를 내 자식 뒷바라지시킨 게 누군데. 그러고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큰소리친 게 나였다.


엄마 원피스를 입고 딸이 어지럽힌 방을 치우고, 먹다 버린 과일 껍질, 컵을 치우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딸의 밥 위에 생선살을 올려 주다 보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라고 엄마가 옷을 두고 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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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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