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네필 스타터 팩 01]
솔직히 털어놓자면, 넷플릭스 드라마 <엄브렐러 아카데미(The Umbrella Academy)>를 완결 시즌까지 다 시청하지는 않았다. 일단 드라마들은 너무 길다. 시즌제가 아니어도 그렇다. 어쩌다 시작하게 되어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나오니까 이름이 헷갈리고 각각의 서사가 헷갈려 결국은 탈주에 이르고 만다. 히어로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엘리엇 페이지의 신작 영화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2024년에 나온 영화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에서, 페이지는 트랜스남성 샘(Sam) 역을 맡았다. 실제의 자신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가족과 불화하고 친구와 같이 살며 우연히 마주친 첫사랑(아마도 그의 퀴어 정체화에 영향을 주었을)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캐릭터. 한 마디로 이 영화는 많은 퀴어들이 공감할 법한 설정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샘은 아버지의 생일을 맞이해 몇 년 만에 고향에 가는 길이다. 그는 기차에서 십 대 시절 아주 가깝고 애틋한 사이였던 캐서린과 마주친다. 두 사람은 오가는 대화 속에서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만, 각자 다른 곳에 가는 길이었기에 아쉽게 헤어진다.
이윽고 부모님의 집에 도착한 샘. 가족들은 그를 반기면서도, 샘을 딸이라고 부르거나 그에게 모욕적인 말을 꺼내 언쟁을 유도한다. 부모님, 누나와 동생, 그들의 이성 배우자들. 샘은 정상성의 세계, 모두가 시스젠더이고 이성애자인 중산층 백인들 사이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황급히 고향 집에서 빠져나온다. 도시의 집에 돌아온 샘을 캐서린이 찾아오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나 남편과 아이가 있는 첫사랑은 고향마을로 돌아간다.
원가족과의 갈등을 결말이 뻔한 퀴어 로맨스(그마저도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로 봉합하려는 시도는 다소 아쉽다. 사실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 자체가 매우 예측 가능하다. '과거에 가족들과 갈등하다 집을 떠났던 주인공은, 오랜만에 그들과 재회하지만 좁힐 수 없는 거리감만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첫사랑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루어질 가망이 없다'. 퀴어영화로서는 예스럽기까지 한 내용이다. 작품의 만듦새 자체도, 한 번쯤 볼 만은 하지만 그렇다고 두고두고 웰메이드라고 회자될 결과물은 아니긴 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엘리엇이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택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페이지는 <클로즈 투 유>에서 주연을 맡음과 동시에 각본과 제작까지 참여했다. 지금 십 대, 이십 대인 젊은 퀴어 배우들이 쌓아가는 커리어(이 또한 아직 쉽지 않다...)를 엘리엇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한 번쯤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고전적인 느낌까지 주는 이야기에 자신을 입혀 스크린에 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상식에 참여할 때마다 드레스를 입으라고 강요 받던 엘리엇이 첫번째 커밍아웃(과 결혼)을 한 이후, 한동안 큰 자본이 투입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를 찾아보기 어려웠다(<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나오긴 했으나 캐스팅은 커밍아웃 전이고 조연이다). 두번째 커밍아웃 후로는 이 트랜스혐오적인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트랜스남성이 되어버렸다(덕분에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 연기한 캐릭터가 '바냐'에서 '빅터'가 되었는데, 슬라브계 인물인 걸 감안하면 이름을 바꾸지 않았어도 될 듯하다. 바냐는 슬라브권에서 원래 남성 이름이다).
<페이지보이(Pageboy)> 책을 쓰고 (이전부터 연출이나 제작을 꾸준히 해왔지만) 프로덕션(Pageboy Production)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퀴어 영화/드라마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엘리엇 페이지. 연기 이외의 일들을 참 많이 하고 있다. (덕후 살려) 그런 가운데서 나온 영화이다 보니, <클로즈 투 유>는 작품 안팎으로 의미가 상당할 수 밖에 없다. 상투적인 전개에도 페이지의 연기는 빛을 발하고, 차가운 도시에 익명으로 숨어드는 것이 때론 생존법이 되고 마는 퀴어의 이야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보기를 권한다. 팬이라면 더더욱, 꼭.
+ 이 영화 평을 써야겠다 마음 먹은 시점에 엘리엇 페이지가 영화 <오디세이>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에 개봉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
++ 이십 대 초중반 시절, 엘리엇 페이지를 덕질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을 견디기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의사들이 치료해서 살린 사람 수보다 레이디가가가 살린 사람 수가 더 많을 거라는 퀴어농담이 있듯이. 트레이시가 헤일리가 주노와 블리스가 리비와 이지가 실비아가 없었다면 그때의 내 인생이 공허했을 것임을 안다.
+++ 2월 21일은 엘리엇 페이지의 생일이다. 날짜 맞춰서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게을러서 그만... 출퇴근하는 평범한 날이었지만 기운이 났다. 믿을 구석이란 존재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