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중간에서 마주보기: 인류세의 시각문화

2025 영상사회학 수업 에세이 과제

by 정이어린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올려둔다!


*제목은 Karen Barad의 저서 <Meeting the Universe Halfway>(2007)에서 빌려왔다.


1. 들어가며: 오크지 이야기


“얼마 전까지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감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오토의 만화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는 가톨릭의 교리가 사회를 유지하던 중세에 이단으로 몰려 죽음을 무릅쓰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만화에 나오는 한 인물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지동설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휘말린 대리검투사 ‘오크지’다. 오크지는 하층 계급이며 귀족을 대신해 결투를 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결투가 끝날 때마다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눈이 고통에 휩싸인 채 꺼져가는 것을 보며, 종종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는 한다. 이렇게나 사람을 많이 죽인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고.


괴로운 현세의 삶을 어떻게든 떠나고 싶지만 죽고 난 후 도저히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았던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력하다. 오크지에게 그가 살아가는 세계, 즉 지구는 온 우주의 중심이자 부정한 것들이 쌓이는 가장 밑바닥의 공간이었다. 당시는 천동설로 일컬어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이 종교와 결부되어 땅에서의 삶을 평가절하하고 신의 세계를 신성시하는 논리로 작동하는 시대였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어릴 적 하늘 보기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이상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게 되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인간들을 비웃으며 내려다보는 신적 존재들의 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크지는 동료로부터 지동설을 접하고서 큰 충격에 빠진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라 다른 행성들과 나란히 운행하는 ‘아름답고 장엄한 천계의 일원’이었다. 그가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더 이상 자신을 노려다보는 천사들의 눈은 그곳에 없었다. 그에게 지구가 운동한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세계의 존재들을 지각할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오크지는 달라진 세계의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지동설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다 이단심문관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고 교수형으로 죽게 된다. 그러나 처형대에 선 오크지는 더 이상 천국에 가지 못할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편안한 표정을 하며 눈을 감는다.


나는 오크지를 보며 세계에 대한 지각의 변화와 삶을 살아가는 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의 위상 변화가 세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에게 실제로 어떤 경험을 하게 하는가. 이후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왔는가.


2. 지식의 변동과 자연의 발명


비록 오크지는 만화 속의 한 인물일뿐이지만, 그가 느꼈던 삶의 권태와 무기력은 일정한 역사성을 품고 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부정한 것은 특정 사물에 특정한 자리를 배정하고 참과 거짓을 정의하는 문화적 질서의 결과”로서 형성된다고 말한다(슈티글러, 리멜레, 2015). 오크지가 ‘지구’라는 사물이 ‘부정한 것’이 모여드는 ‘밑바닥’에 위치해있다고 여긴 것은 진리의 권위를 담지하던 당시의 종교의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14세기까지 이슬람과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원성을 강조하던 종교적 지식체계에 매여있었고(이진현, 2024: 69), 이 지식체계는 곧 존재자들의 시선과 존재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시각문화 연구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시각성에 대해 논의한다. 슈티글러와 리멜레는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15세기 말 무렵 그린「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을 통해 기독교적 시각문화를 분석한다(슈티글러, 리멜레, 2015). 이 그림에는 신의 눈처럼 보이는 네 가지 동심원 속에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이 그려져 있는데, 하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의하라, 주의하라, 주님이 보고 있다.” 이 그림은 왕의 명상 도구로 쓰이거나 식탁에 빈번히 그려졌다는 점에서 당대인들의 일상 세계에 깊이 침투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며 부정하다고 여겼던 행동을 삼가했다. 오크지가 ‘자신을 노려보는 밤하늘의 눈’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중세의 유럽인들도 천계의 따가운 눈초리 밑에서 살아갔다.


중세까지 뚜렷했던 땅과 하늘의 경계는 점차 무너지게 된다.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이어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수학적 법칙을 정초해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전환시켰고, 뉴턴에 이르러 그들의 발견은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보편 과학으로 정립되고 통합되었다(노승미, 2023: 48). 과학혁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변화는 행성들 간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써 지구의 위치를 옮겼을 뿐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 또한 변화시켰다. 아렌트는 이러한 변화를 일컬어 인간이 태양의 위치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아르키메데스적 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아렌트, 2019: 373). 인간을 공간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수학적 능력에 의해 ‘지상에 묶여있는 자(Latour, 2017; 김지혜, 2019; 258)’로서 인간 자신의 감각과 경험은 억압되었다. 인간은 땅의 속박을 풀고 우주적 존재가 되었고, 근대적 의미를 띤 자연이 ‘발명’되었다(데스콜라, 2022). 땅과 하늘의 이분법이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으로 대체되었다.


3. 행성적 관음증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특정한 관점을 지닌 구체적인 관찰자에 의해 포착되며 복수의 ‘문화’와 대응쌍을 이루며 등장한다. 이 관찰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 주체가 아니라 사이보그 혹은 반려종의 형태이다(해러웨이, 2019). 매체성, 재현 규범, 지식체계와 같은 요소들이 우리가 보는 방식에 개입한다. 오늘날 우리는 사이보그가 형성해내는 자연의 이미지로 둘러쌓여 있으며, 이는 늘 도시에서 벗어나거나 인적이 드문 환경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많은 자연 다큐멘터리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접하지 못하는 곳의 스펙타클을 묘사한다. 그렇게 생산된 이미지를 공급받는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보는 주체로 위치지어진다. 따라서 지구는 거대한 하나의 판옵티콘이 된다.


오늘날 ‘아르키메데스적 점’에 위치해 있는 또 다른 사이보그의 형상은 인공위성이다. 2024년 기준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인공위성 수는 현재 1만 3,000여 개 이상에 육박하며, 향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러한 위성들은 디지털 인프라를 형성하며 우리가 구글어스 등을 통해 어디든 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시각적 통제의 욕구와 밀접히 닿아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최근 물-에너지 넥서스(Water-Energy-Nexus) 지식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수자원의 양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생태적 데이터들을 시각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전제한다. 이는 산업적이고 식민주의적인 관점을 반영하며 해당 장소의 토착민 주권을 억압하는 데 기여한다(Robb 외, 2021).


<그림 1> 지구 궤도에 있는 연도별 인공위성 수 추이(1957년~2022년)(단위: 개)(출처: JSR)


조경학자 더글라스 롭은 전지구적 환경 변화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기술적으로 매개된 자연의 이미지화 및 시각화 경향을 두고 ‘행성적 관음증’에서 비롯되거나 그것을 생산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시각화가 어떤 특권을 생산하는지 또는 어떤 인식과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지 질문한다(Robb, 2020). 행성적 관음증은 특정 관점의 이해에 맞게끔 자연을 재현함으로써 곳곳의 장소를 기반으로 한 삶과 지식들을 뭉개버리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물-에너지 넥서스는 전지구적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중적인 생명의 존재 방식을 보지 않는 지식을 생산한다. 롭은 이를 지리학자 브루스 브라운의 용어를 빌려 ‘이중시각’이라 명명한다.


한국에서는 1960-70년까지만 해도 산에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은 일부러 산불을 내고 밭을 개간해서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했다. 그런데 80년대 초에 박정희 대통령은 산을 국유림으로 전환했고, 산림청을 통해 ‘치산녹화’ 사업을 진행하며 화전민들은 쫓아냈다. 숲은 “엄혹하고 획일적인” 방식으로 울창해졌다. 녹화라는 자연 관리 사업은 산과 자연을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이후 송이 버섯 채취와 같은 임업이 울창한 산 속에서 시행되었다. 화전민들에게 산은 일상이자 거주의 공간이었지만, 그들이 쫓겨난 후에야 지금 우리가 보는 산의 ‘사회-생태적 경관’이 조성되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40년도 더 전에 일어났던 이중시각의 예시이다(장예지, 2017).


4. 내부로부터 보기


무엇보다 이러한 아르키메데스적 시각은 인간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일 뿐 함께 얽혀 살아가는 공생자로 감각되지 않는다. ‘행성적 도시화’가 만들어내는 문화는 지속적으로 외재적 자연을 발명하고 재생산한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데이터와 위성 사진, 수치로 구성된 자연 담론이 환경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지 바라보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Ingold, 2011: 95). 인간은 자연 속에서 거주하며 살아가지만 근대 과학의 지식 체계는 ‘지구’를 관찰과 측정, 측량, 영토화의 공간으로 분절한다. 도시 환경은 단단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땅과 하늘을 분리시키고, 건축가는 어떤 인간도 볼 수 없는 새의 시각으로 건물을 설계한다.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게 맞는 걸까?


잉골드는 인간이 지구의 모양을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을 하나 소개한다. 심리학자 스텔라 보스니아두와 윌리엄 F. 브루어는 6~11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구의 모양을 그려보게끔 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평소에 감각하는 평평한 지면을 그리지만, 지구는 푸른 모양의 구체라는 사실과 자신의 감각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형의 지구에다 하늘을 그리라고 하면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한다. 아이들은 ‘관찰자의 시각’과 ‘거주자의 시각’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했다. 잉골드는 뒤이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단단한 땅, 즉 지구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땅 ‘속’에서 활동하며, 하늘에 잠겨 거주한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땅 위의 어떤 풍경을 본다면 그것은 거리감을 둔 채로 관조적으로 객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보는 것이다. 잉골드는 메를로-퐁티를 따라 빛과 시각의 관계에 대해서도 재규정한다. “우리는 빛을 보지는 않지만, 빛 속에서 잠겨서 본다.”


인간으로 살아가며 자연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세기 초반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근대의 자연과학을 성찰하며, 과학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는 방식이 곧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을 좌우한다고 말한 바 있다(아렌트, 2019: 372). 결국 거주할 세계를 만들어내는 건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바로 자기자신인 것이다. 반대로 바깥의 초월적 위치에서 세계를 관찰한다는 것은 곧 그 세계를 거주불가능하게 만들어낸다는 것을 말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자연은 그 어떤 은유도 아닌 의미에서 우리의 몸인 것이다. 우리는 그 내부에서 다리를 젓고 팔을 휘두르며 세계를 보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5. 결론: 지구와 중간에서 마주보기


한때 지구의 품안에 있던 돌과 천공에 떠 있던 별들이 아직도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하늘 위에서건 땅 밑에서건 간에 모든 것이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하고 또 어느 곳으로부터도 운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 발견된 모든 별들은 점성술의 천궁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돌들도, 비록 모두가 자로 재어지고 특수한 무게와 강도에 따라 자세히 검증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고 또 어떠한 도움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이 인간들과 얘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Benjamin, 1969; 오창호; 2004에서 재인용)


다시 오크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크지가 다시금 삶 속에서 경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지구가 운동한다는 ‘과학적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학적 사실’이 오크지를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권위주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던 시대에 지동설은 오크지에게 더 넓은 우주를 상상할 수 있게 했고, 더 넓은 우주에 대한 상상은 곧 오크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그제서야 오크지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전의 세계는 오크지에게 거주불가능한 세계였지만, 지구가 운동하는 세계는 오크지로 하여금 삶을 살아가게끔 했다. 설령 그 세계에서 살아가다 죽음을 맞더라도 후회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여지가 있는가. 기후생태위기 담론은 임박한 파국으로서 거주불가능한 세계를 상정한다. 하지만 크레나키가 지적하듯, 어느 원주민들은 이미 종말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크레나키, 2024). 이미 에코사이드와 멸종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되었고(주윤정, 2022), 우리가 의거할 수 있는 세계는 너무나도 빈약해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관하거나 낙관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당신이 세계 바깥에 있다는 것이며,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동하는 힘은 타자가 우리에게 빌려준 것으로부터 나오므로(잉골드, 2024: 294; 권범철, 2025; 326에서 재인용)”, 참여는 곧 책임이자 응답으로 불어난다. 자본이 지구를 수치, 등급, 영토의 공간으로 만들어 그들을 침묵시킬 때, 내부로부터 지구를 바라보려는 시도들이 나무와 달과 별을 다시 노래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를 살게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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