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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uly Nov 13. 2023

빈곤 과정 - 1장,2장

(논문 쓰기 일지 - 4일째)



 p.40 어쩌면 역사를 소급해 한국전쟁 직후 '원조 복지 체제'의 잔영을 다시 비춰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이 발전국가 궤도에 진입하기 전인 1950년대, 외원 기관이 제공한 원조 물자 규모는 보건사회부의 복지예산을 압도했다. 복지가 세금에 의존하지 않으니 국가는 시민들의 사회적 위험에 대응해야 한다는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시민들 역시 국가에 대한 기대가 낮았다. 윤홍식은 이 경험이 "한국 사회에서 복지가 국가의 역활과 무관한 사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생활보호법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로 전환하던 2000년대에 많은 혼란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p.45 2000년에도 주민들은 '수급권자'보다 '영세민'이란 단어를 친숙하게 느꼈다. 국가의 공공부조가 보호에서 보장으로, 구호적 차원의 지원이 아닌 자활을 조건부로 한 생산적 지원으로 바뀌었다해도, 국가 지원을 일방적, 시혜적 복지의 틀 안에서 생각하는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 정책이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밀가루가 쌀로, 다시 돈으로 바뀐 것일 뿐, 보호와 보장의 차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틀로 정리된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빈곤'을 관료-기계에 맞게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수급권자'에서 탈락하게 된다. 결국 '빈곤' 퇴치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제도는 빈곤을 활용한 통치에 적합한 제도가 된다.


p.62 한 활동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빈곤층 관리에만 중점을 둘 뿐 빈곤층의 권리와 욕구를 중심에 두고 정책을 설계하지 않는 한계를 비판했다.           



2장 의존의 문제화


2장에서 조문영 선생님은 의존에 대해서 낯설게, 다르게 보기를 시도한다.           


 p.64 영화에서는 의존이 지긋지긋한 인간관계로 그려지지만, 사실 삶에서 의존만큼 당연한 행위도 없다.           


p.64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우리 과제는 '독립'이 아닌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어야 한다.          


여기서는 복지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p.66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p.66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 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          
 p.67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그룹홈의 부모가 영재한테 의존하면서도 그에게 낙인을 씌우듯, 복지 종사자들 역시 빈자에게 기대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심판자를 자임한다.           
 p.67 하지만 삶의 당연한 형태인 의존이 수급이라는 관료-기계(1장 참조)와 접속하면서 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이 누적된다는 것, 살면서 푼돈을 벌겠다고 폐지를 줍고 이따금 가족을 만나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까지 미심쩍은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릴 자신이 없다. 관료-기계와 씨름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더욱. 돌봄과 폭력의 얽힘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데 당연하게 필요한 의존이 어떻게 낙인으로 변해왔는지를 추적한다.           


 p.70 프로카치는 이 담론의 공격 대상이(산업사회에서 자연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사실로 인정된) 불평등의 제거가 아닌 "차이의 제거"임을 역설한다. '차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강조했던 바는, 사회적 빈곤이 일련의 품행 - 즉 사회화 기획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겨냥하면서 극빈을 "신체적, 도덕적 습성들의 집합"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술에 절어 방탕하게 사는 사람,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사람, 구호금을 탕진하는 사람 등 자본주의 체제 노동자 기준에 미달하거나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이 품행이 의심스러운 빈민으로 내몰렸다. 경제적 의존을 도덕적, 심리적 의존과 자의적으로 연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 그 이상의 잘못된 무언가가 있다"라는 암묵지를 만든 것이다.          
p.71 민주주의 혁명 이후 급부상한 시민권이 '독립'과 동의어로 통용되면서, 한때 사회적 관계를 지징하면서 중립적으로 쓰이던 의존은 도덕적, 심리적 기록register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생계부양자 남성과 '의존적인' 피부양자 여성의 우열관계가 산업화 시기 이후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p.71 프로카치와 프레이저, 고든의 연구는 자율적, 독립적 개인이란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및 산업화 체제와 조응하며 발전해온 담론적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자율적, 독립적 개인의 대척점에서 문제적 존재로 부상한 수동적, 의존적 인간 역시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           
 p.74 의존이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의존적 개인과 자율적, 독립적 개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의존을 통해 인'간'을 형성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조문영 선생님은 2000년대 중반 중국에서의 현장연구,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 현장연구를 소개하면서 노동이 의존의 필수조건이 된 배경을 소개한다.           


 p.80 어떤 학자들은 서구의 빈곤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접한 의존성dependency을 계획경제의 역사 속에서 재발견했다. "둥베이의 비옥한 자원"이나 종신고용을 의미하는 국유기업의 철밥통 시스템이 노동자들의 의존성을 배양한 문화적 토양으로 거론됐다. 한때 인민의 대표집단으로 호명되던 노동자, 농민들은 중국의 발전을 지체시키는 병목이자, '소질'이 낮은 문제 집단으로 등장했다.          
p.84 '오애'의 구성은 시기마다 바뀌었어도 노동은 제외된 적이 없다. 노동이 생산을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자격을 갖춘 "가치 있는" 인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페다고지적 도구"가 된 것이다.          
 p.85 도시 질서를 위협하는 '자격 없는' 국민, 인민에 대한 통제 역시 한국과 중국에서 비슷하게 등장했다. '사회적' 빈곤은 "유기적 사회질서 구성을 위한 기술들을 고안해내기 위한 개발구역으로, 이 새로운 사회질서는 지금까지 특정한 형태 없이 존재해온 사회적 삶의 영역들을 관리 아래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p.93 이러한 빈민운동의 역사에서 '자립' 또는 '자활'은 알아서 살아 남기를 강요당했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의존의 그물망을 함께 새로 짜는 실천이었다. 재난, 소득, 인맥, 학력, 기술 등 의존할만한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부실한 사람들이 나눔을 통해, 외부 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상호의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자금과 경험이 부족하고,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지향도 달랐던 까닭에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지만, 참여자들은 협동의 즐거움, 노동에 대한 자부심, 숙명처럼 여겼던 가난을 함께 헤쳐나간 보람을 기억했다.          


새롭게 등장한 자활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빈민들의 운동을 모델로 삼아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복지와 관료-기계에 포섭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p.94 이러한 역사를 돌아볼 때, 빈민운동의 생산공동체운동을 모델로 하여 정부가 시행했다는 자활사업이 오늘날 참여자들 사이에서 '수치' '우울' '전망 없음' 등 부정적 평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점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p.95 빈민운동이 밑돌이 되어 성장했다는 자활사업이 빈곤의 낙인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은, 2000년 국민기초생활법 시행 이후 사업이 수급과 제도적으로 결합하고, 관료-기계에 편입된 배경 탓이 크다. 수급자의 '복지 의존성'을 문제 삼고 노동력의 재상품화를 지향하는 영미의 근로연계복지workfare가 기초법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면서, 노동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빈곤층은 자활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수급권을 보장받았다.           
 p.96 운영의 헤게모니를 놓고 "'전통적 자발성'을 지닌 사회운동 진영과 '제도적 전문성'을 지닌 사회복지 진영" 사이의 골은 깊어졌고, 정부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전문성의 근거로 인정하면서 사회운동가들을 자연스럽게 "비전문가"로 내몰았다. 더욱이 복지와 노동을 인위적으로 결합한 자활사업은 시행 과정에서 딜레마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수급자들이 창업하는 자활기업은 지역 복지와 공공성, 연대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수익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 실무자는 사회복지 종사자인가, 사업경영자인가? "복지와 시장이 융합된 자활사업과 같은 혼종적 영역을 관할할 최종적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투입 예산에 비해 참여자들의 탈수급율과 자활 성공율이 저조하다는 정부와, 수급자들의 가난은 복합적이어서 곧바로 자활에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자활센터 간의 의견 충돌이 반복됐다.           
 p.96 이러한 혼란과 딜레마는 결국 가난한 수급자의 사회적 고통을 악화시킨다. 과거의 생산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협동조합에서와 달리, 자활사업 참여자는 처음부터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한 채 호명된다.           
 p.97 인터뷰 참여자 대부분한테 자활사업은 "자립이 아니라 '숙명적' 의존 상태"로 여겨지며 자립 가능성의 소실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민이 단지 '가난한' 사람이라면 수급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97 2000년대 초반 난곡에서 현장연구를 할 때 나는 정치적인 저항 운동으로서 주민조직화라는 화두가 점점 자활이라는 절대적 명제 앞에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외환위기와 맞물려 지역에서 뿌리내린 운동이 복지라는 생경한 단어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가시화된 사회 위기에 대응해 정부, 기업, 복지 재단의 후원금이 쏟아지면서 활동가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주민을 만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는 전문성을 요구했다. '운동'이라는 투박하고 추상적이고 정치적인 용어가 아닌, '복지'라는 세련되고 중립적이면서도 학술적인 계보를 따질 수 있는 스타일을 원했다.           
p.98 관계도 달라졌다. 활동가-주민 이라는 '동지적' 관계는 실무자와 클라이언트라는, 사실상 고용인-피고용인 관계로 전치되었다.            
 p.98 조건부 수급자 대다수는 '을'의 위치를 당연시하면서 자활사업이 실제 자활을 돕지 못한다는 점을 수세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기준과 절차가 달라지면 자활이 가능할까?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활력이 생겨날까? 저항이 관료-기계의 양식에 단단히 포섭됐고, 이 양식을 벗어난 저항은 트집과 몽상으로 남았다.           


정리하자면

1.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해서 빈민을 관리하는 빈곤통치가 시작되었고 

2.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 양태인 '의존'이 낙인으로 변하였고 

3. '의존'의 조건으로 '노동'이 추가되었으며

4. '의존'을 위한 노동인 '자활'은 복지와 관료-기계에 포섭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핵심은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실질적으로는 빈민을 주류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NEET에 대입해본다면 아마도 NEET 극복을 위한 제도가 실질적으로는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빈곤통치와 다르게 NEET 통치라는 말은 사실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청년들 스스로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불평등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탓하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인터넷에서 뒷담화하는 것에 만족하는 정도) 그런의미에서 NEET 통치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통치라는 말로 더욱 통용되는 듯 보인다. 즉, 청년들 스스로 경쟁에 뛰어들고 스펙을 통해서 상대 우위로 '좋은' 직장에 가는것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는 마음가짐 자체를 키워내고 그 안에서 불평등에 대해 불평하기보다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탓하며 능력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옳은 자세라고 스스로 되새기게 만드는 그것 자체가. 아마도 신자유주의 통치이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NEET의 발생은 필연적일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한편으로 지속된 취업실패에 낙담하고 쉼을 가진 자, 직장 내의 문화 혹은 일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쉼을 가진 자, 애시당초 나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서 고민 하는자, 계속해서 준비하는 자 등 NEET가 되기 좋은 조건이 많은듯이 보인다. 이렇게 NEET안에 다층적인 면이 있는데. 문제는 NEET 극복을 위한 제도가 임금노동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양한 기회를 통해 직업 선택의 기회를 가지기 보다는 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키워내기 위한 임금노동 중심으로 되어 있다. 문제는 누군가는 휴식이, 누군가는 고민해보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누군가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는데. 취업성공패키지와 같은 프로그램은 그렇게 많은 옵션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NEET에 대한 이해없이 기존의 관행대로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임금노동이라는 것도 애매한데.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적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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