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니를 수없이 그리고 메모했던 이 스프링 노트는 학교 매점에서 샀다. 매점에서 가장 인기 없는 코너는 문방구류였는데, 학생들은 볼펜과 노트 대신 전자기기를 애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북이 쌓인 커피와 초콜릿과자 따위를 지나치고 너무나도 고요한 문방사우 앞에 섰다. 가벼운 노트를 사야 했다. 관성적으로 천 원짜리 무지 노트를 찾아보다가 이제는 천 원 노트의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습작은 싼 종이에 손목이 저리도록 그려내는 게 최고인데. 천 원은 더는 재화의 가치로 인정되지 않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이 쭈그려 앉아 매대를 뒤졌다. 한참 뒤적거리다 어렵사리 이천 원 노트를 하나 찾아냈지만, 그것의 표지에는 보기 흉한 캐릭터가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넌 나를 살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위 칸의 파스텔 무광 노트는 삼천 원. 노트 하나 사면서 어느덧 점심시간의 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떤 노트 필요하세요? 말간 얼굴의 매점 알바생이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나의 묵직한 걸음걸이를 줄곧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잠깐 한산해진 틈을 타서 말을 붙여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가벼운 노트를 찾고 있어요. 알바생은 경쾌한 스냅으로 파스텔 노트를 꺼냈다. 자신도 이걸 쓰는데 팍팍 찢어 쓰기 좋다고 했다. 그렇군요... 나는 어쩐지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저 사람은 노트를 고르는 데 있어 5초도 걸리지 않았어. 나는 다리가 저린 와중에도 결정하지 못했고. 혹시 고민하는 행위에 중독되어 버린건 아닐까?
작년에 어떤 노교수가 명예퇴직을 몇 년 앞두고 자기 밑에 학생들을 좀 붙여달라고 했다. 평소에는 전혀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과에서 나를 추천하는 바람에 어느덧 그의 앞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됐다. 그는 내 담당교수가 될 것이고 앞으로 많은 걸 의논하자고 했다. 매 학기마다 높은 수준의 고민을 토로해야 할거라고도 말했다. 미대에서,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를 하자니.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호감을 내비쳤다. 교수를 만난 것이 득인지 실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노트를 고르는 데 있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절차와 검증을 거쳐야 한다면 필시 이 교수를 만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재와 허상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에 집착했다. 상의 경계를 찾지 못하면 수없이 고뇌하게 만들었다. 나도 그를 따라서 사고 훈련을 계속하게 되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나는 알바생이 들고 있던 파스텔 노트를 가져다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는 영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웃음을 지었지만, 결제 역시 속전속결로 끝났다. 나는 노트를 들고 습작실로 직행했다. 어두운 습작실에는 먼지냄새만 가득할 뿐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방석을 주워다 창가에 걸터 앉아 와이파이를 잡았다. 바로 학교 커뮤니티에 접속해 글을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대 서양화과 학생입니다. 드로잉 배우실 분 있으면 연락주세요. -
드로잉 과외는 예전에도 한 적 있었다. 학과 공부에 집중하려고 그만뒀었는데 지금은 신선한 노동의 가치를 느끼고 싶었다. 이곳의 공기는 너무 묵직해서 자꾸만 어깨를 짓눌렀다.
-드로잉, 배우고 싶어요. -
곧 달린 댓글에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보냈다. 이어 메신저에 메시지 수신 알람이 떴다. 프로필 사진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네. 나는 이 사람이 내게 바깥 공기를 쐬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