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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Dec 03. 2020

언니 4

-4-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는 미술에 조예가 깊은 쪽은 아니었다. 프로필 사진에 호크니의 그림이 걸려 있었던 이유는 그즈음 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데이비드 호크니 전을 관람했기 때문이었다. 달에 한 번 신작 영화를 관람하러 영화관에 가는 것처럼, 티비에 소개되는 큰 전시회가 있으면 한 번쯤 구경가보는 부류였다. 그래서 관람 소감을 물었더니 '더 큰 첨벙'의 색감이 예뻐서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더 큰 첨벙’은 호크니의 대표작인 수영장 시리즈 중 하나다. 그리고 아트샵에서 엽서 두 장과 펜을 샀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 펜으로도 펜 드로잉 가능할까요? 엽서 뒤에 그림을 남기고 싶어요.-

-똥 나오는 볼펜으로도 드로잉 할 수 있어요. 뭐든지 그리는 게 중요해요.-

-네ㅎㅎ-


그렇게 한 달 넘게 언니의 그림을 봐주게 되었다. 커뮤니티에 과외 글을 올려 언니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드로잉 기초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매일 밤 습작실에 붙어있으면 담당교수의 눈에 띌 게 뻔했고. 케케묵은 종이 냄새보다는, 입김이 살짝 날 정도의 찬 공기를 맡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자기가 다 그려놓은 그림을 봐주기만 해달라고 했다. 문법 공부 없이 피드백만 받겠다는 말에 김이 좀 샌 건 사실이었다. 어디로든지 나가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과외비는 깎을 수 없다고 하니 상관없단다. 나는 매점에서 산 파스텔 무광 노트 첫 장에 과외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X요일 저녁 7시 과외 첫날 피드백

예전에 만화를 그린 적이 있나? 순정만화 그림체가 남아있음. 순수한 사람? 좀 더 눈에 보이는 그대로. 구도 잡기. 구도. 구도를 모른다. 집에 드로잉 책 찾아서 찍어 보내줄 것.]


과외비는 첫 피드백이 끝나고 바로 입금되었다. 마침 떨어진 케냐 AA 원두부터 샀다. 다음날 바로 배송받은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내리면서 언니한테 연락을 했다.

-과외비로 원두를 샀어요. 감사합니다. 잘 봐 드릴게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너무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나? 막 갈아내린 원두 향이 너무 좋아서 슬쩍 들떠버린 탓도 있었다. 좀 솔직한 사람인 것 같아서 나도 한 발짝 더 들어선다는 게 그만. 과연 선을 넘은 것인지 불안해져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이 사람도, 커피를 좋아할까?

-네ㅎㅎ 저도 드립 커피 좋아해요. 다음에는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면 좋겠네요.-


나는 언니의 답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노트를 찾아 첫 피드백 밑에 '이 사람은 커피를 좋아한다'고 적었다. 옆에는 원두커피 봉지와 그라인더, 머그잔을 그렸다. 그리고 당신도 그리고 싶었지만. 알지 못하는 모습을 그릴 수는 없었다. '이 사람'과 '?'을 여러 번 적으면서 동그랗거나 길죽하거나 조그마한 얼굴들을 마구잡이로 그렸다. 안경을 씌우거나, 긴 머리를 하거나, 마스크로 가리거나, 포니테일을 하면서. 그렇게 언니이자 언니가 아닌 사람을 처음으로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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