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라는 이름의 얼음

(on the rocks, 위스키 사워)

by UX민수 ㅡ 변민수


얼어붙은 마음의 온도 _ 감정은 늘 한 템포 늦었다


처음 조직에 합류했을 때,

아무래도 깡깡 얼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의 UXer와 함께 있다는 낯섦도 한몫,

어쨌거나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말 한마디에도 눈치가 앞섰다.

회의 시간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고,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주니어’라는 말은 미숙함보다

‘눈치’라는 말에 더 가까웠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나를 죄었다.


말하지 못하고 삼킨 생각들이

내 안에서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바쁘고 어지러운 전쟁터 _ 모든 흐름이 그냥 너무 빨랐다


오전 10시, 대회의실.

노트북 자판 소리와 마우스 클릭음,

누군가가 무심코 넘기는 슬라이드의 속도까지

모든 게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잡기 바빴다.

스크린 속 화면은 바뀌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정지되어 있었다.

모르겠는 말들이 아는 말도 집어삼켰다.


누구 하나 내게 묻지 않았고,

나는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

그건 회의라기보다 실시간 전쟁 중계 같았다.

매 순간 누가 살아남고, 누가 놓쳤는지를

무언의 눈치로 가늠해야 하는 자리.


숨죽이며 주변 반응을 살폈다.

‘지금 이걸 메모해야 하나?’

‘모르겠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되나?’

‘방금 말한 거… 나한테도 해당되는 건가?’


이 모든 고민이

질문 하나 던질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다.


나는 그저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채,

숨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총알을 맞았는지 피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눈치라는 얼음 위에서 _ 말보단 표정, 속도보단 톤


그때의 나는

감정 위에 얼음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속은 뜨거운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여야 했고,

조금이라도 흘러나오면

모든 걸 망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현실이라는 술이 부어졌다.


쓴 위스키 같은 말들,

따가운 레몬처럼 시린 자각들,

가끔은 단맛 같은 위로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여전히

“이걸 삼킬 수 있을까?”였다.


위스키 사워.

얼음 위에 부어지는 현실.

날카롭고 진하며,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그걸 마시며

나는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몰입이 감정을 녹이다 _ 위스키 사워처럼, 천천히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회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도 다루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건 원래 그런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몰입의 신호였다.

몰입이라고 해서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이해가 되면서 조금씩 일과 친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내 안의 얼음이 조금씩 녹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런 의미로 정리해 봤어요.”

“혹시 사용자 입장에서 이렇게 느껴지진 않을까요?”


그 작은 말들이

내 감정을 설계로 바꾸는 기술이 되어갔다.



균형, 그 감각을 익히다 _ 두 발 자전거를 타듯이


위스키 사워는

위스키의 강렬함과 레몬의 산미,

설탕의 단맛이 균형을 이루는 칵테일이다.


UX라는 일 역시

감정, 데이터, 협업 등

여러 가지를 설계 안에서

균형 있게 버무리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그저 사용자만 대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감정을 숨기려 했다.

지금은 감정을 다룬다.

처음엔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흐름을 파악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더 이상 얼음 뒤에 숨지 않는다.


위스키 사워를 마시듯,

진하게, 때로는 시게,

균형 있게 감정을 다루는 연습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얼음은 녹는다.

녹은 감정은 설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