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 대잔치
[방어적으로 돌변하는 관계: 소통의 기초는 무엇인가?]
업무를 하다보면 나든 상대든 방어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의 대부분은 상대가 본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거나, 강요받는 느낌을 받을 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현재 말하고 있는 안건이 제대로 소통되기 위해 필요한 기초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 기초는 각자 살아온 환경의 가짓수에 의해 무한히 다양하며 심지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적이다. 대학 때 어떤 것을 공부했는지, 그리고 어떤 정보에 매력을 느끼고 학습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이 이 ‘기초’라는 것을 어떤 방향으로 강요하는지처럼 말이다.
이 기초는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조직에서도 쉽게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정 조직에 ‘들어왔다’라는 이유만으로, 들어온 직후에 조직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즉각적인 파악이란 것은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뛰어나게 협응했을 때 가능하다. 조직의 안건들에 대한 꾸준한 정보 문서화, 그리고 그 문서화의 질적 수준, 그러한 정보를 빠르게 습득시킬 수 있는 온보딩 시스템, 시스템과 신규 인원을 자연스럽게 이어줄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와 같은 부분일 수도 있고, 조직이 현재 어떠한 상황과 국면에 처해있는지에 대한 것 등 ‘파악’이란 것은 매우 포괄적이고 심오한 것들을 수반한다.
[익숙함은 관계를 잠식시킨다.]
사람은 보통 자신이 갖고 있는 익숙함으로 상대가 가진 기초에 대해 착각하곤 한다. 자신이 익숙한 정보들이 자신의 머리에서 얼마나 빠르게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되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들의 ‘기초’로서의 난이도를 단정짓곤 한다.
이러한 익숙함이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의주시하지 않으면, 이는 다소 폭력성을 띠게 된다. ‘이걸 왜 몰라?’라는 내면의 생각을 시작으로, 더 심하면 “이걸 왜 모르시죠?”라는 외부적인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이런 적대성은 노골적이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사람들을 어떤 카테고리 안에 규정시켜버리거나 배제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배제의 근거적 타당성]
이러한 배제성의 큰 문제는, 정말 덜 떨어져서인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는, 나의 기초 배경을 상대에게 ‘나만의 언어’로 설명하여 이해하지 못 한 상황이거나, 혹은 정말 그 설명조차 하지 않아 상대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업 제안서나 기획서를 내부 이해관계자에게 전달한 상황에서, 해당 문서가 다룬 내용이 ‘뭘 해야하는지’만 적혀있는 경우다. 협업 하는 사람이 같은 직무자라면 그나마 실마리를 잡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디자인이나 개발과 같이 직무적으로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경우에는 상대가 제시한 정보가 나온 배경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조차 어려워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단계에서는 이러한 판단을 하기에는 이른 경향이 있다. 같은 산업군, 사업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도 시장의 상황에 따른 수많은 맥락들이 존재하며, 이를 조사하는 사람의 ‘기초’에 따라 또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리고 상대의 이해 혹은 역량의 수준을 개인적인 소통으로 근거짓는 것은 위험하다. 진짜 문제는 허술한 조직적 온보딩 시스템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역으로 ‘나’의 낮은 언어적, 공감적 역량이 문제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물론 상대의 나태와 근거없는 발악으로 소통이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이런 명확한 이유를 콕 집어내기 위해서는 해결 가능한 것, 혹은 문제 삼을 소지를 가진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게 말하면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결하여 다시 생산적인 소통을 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상대가 딴소리 하지 않도록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취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정보 비대칭 지점 파악과 심적 안정성 보장
소통에서 발생한 정보의 비대칭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가 어떤 부분을 모르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은 굉장한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조직의 환경에서는 ‘모른다.’와 같은 표현과 행동은 성과와 직결될 수 있을까 싶어 자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적인 투명함과 안정감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상대가 자칫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고, 이를 악용할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가야 한다.
(2) 정보적 도움
나와 상대의 소통에서 문제 지점을 파악했단 것은, 둘 중 하나가 정보적 우위에 있음을 뜻한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라면 정보적 우위에 있는 사람이 해당 정보를 최대한 빠르게 습득하여 소통을 원활화 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좋다. 특히 조직 내의 소통이라면, 우린 일을 빠르게 해내고 성과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방식으로 정보에 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 좋다.
[배제는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든 업무든 초기적 단계에서는 단 한명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소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서로 고려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을 같이 갖춰나가야 하는지 시행착오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뚜렷한 근거 없이 자신의 지식적 우월성(이 개념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느냐도 의문이긴 하지만)에 심취하여 상대를 처음부터 단정짓고 판단하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을 야기시킬 수 있다. 특히 조직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특장점으로 모인 것이기 때문에, 정보 비대칭성은 기본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갖춰져 있다. 즉, 내가 가진 기초 정보로서 상대를 판단했다간, 내가 없는 기초 정보에 전문성을 가진 인력에 대해 손실을 입게 될 수 있다.
[대화는 양방향의 예술이다.]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성이든 감성이든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야만으로 이어진다. 나의 정보적 우위를 근거로 상대들을 배제하면, 내가 갖고 있는 정보는 그 수준에서 멈출 수 밖에 없으며, 사람들과 관계성과 상호작용 기술은 매우 악화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마다 가진 지식과 관점도 저마다 다양하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오고가는 말과 행동을 통해 때로는 공격적인 불씨가 튀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화학반응을 통해 의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나의 관점을 점철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이런 치열한 작용을 통해 때로는 나의 기초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상대와 함께 융화되기도 해보면서 확장의 경험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노력을 수행하고, 이에 대한 명확한 소통이 이어진 후에야 ‘판단’을 위한 근거가 조금이나마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섣불리 판단하고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미리 제거 가능했지만 제거하지 않음으로 인해 본인에 대한 역풍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고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사람 나름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박시 당신 말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