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기면증은 아니었을까

by 배가본드

나는 잠이 많다. 잠을 조금만 줄여도 다음날 정신을 못 차린다. 잠을 많이 자도 특정 상황에서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주로 이전 직장에서 그랬다. 거래처 직원들과 미팅할 때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서 상사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여러 번 있고, 심지어 부서장님과 1:1로 이듬해 연봉협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형편없이 잠들어 버린 적이 있다. 무슨 교육이라도 받을 때는 암만 귀를 세우고 몰입해 보려고 해도 분명 몇 초 전까지 초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책상에 엎어져 있고, 강사는 뿅 사라졌고, 수십 명이 있던 강의장은 괴기스럽게 텅 비어 있고, 두 시간이 순삭되어 있다. 심지어 몇백 명을 앞에 놓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도중 포디움을 붙잡고 졸았던 적도 있는데, 순간적으로 잠꼬대를 한 듯한 느낌에 황급히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다행히 청중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그 사람들도 졸고 있었던 걸까?).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소용이 없었고, 피곤한가 싶어 잠을 많이 자 보아도 효과가 없었다. '나는 잠이 많고, 의지가 박약하며, 정신이 썩었다.' 결론은 그 하나밖에 될 수 없었다.

졸리면 살을 찌르거나 꼬집거나 뭐라도 하라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지금 졸리다는 사실을 인지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어 버리는데 그게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때 기면증은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알아보니 기면증은 뇌의 각성을 유지하는 신경세포가 소실되어 발생하는 신경계 질환으로, 의학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절로 낫진 않는다 한다. 그때 나는 기면증이라는 말도 몰라서 병원에 가 볼 생각 자체를 못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외국에서 몇 년 살다 온 뒤로는 그런 모습이 없어진 걸로 보아 그때 그건 기면증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긴데요. 저는 예전에 이랬던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말했다. 그때 왜 병원에 안 갔냐고. 실은 안 간 게 아니라 가 볼 생각 자체를 못 했던 건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아마 병원에서는 높은 확률로 기면증 아니라고 했을 테고, 나는 내가 게으른 사람인 줄 알고 평생 나 자신을 경멸하며 살아야 했을 테니까. 회의만 하면 까무룩 잠들고, 강의만 들으면 깨구락 잠들고, 책만 펴고 앉으면 깨꼬닥 자고, 독대 면담을 하면서도 꽥 잠들고, 운전 중에도 눈이 슬슬 감기니 면허를 갖고도 오랜 세월 운전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의지박약자로 생각하고 살아야 했을 테니까.




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꿈을 꾼다. 그 꿈이 깨어나기 전에 또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꾼다. 꿈은 꿈을 잉태한다. 나는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든다. 병원이 있다. 캄캄하다. 물결이 울렁이는 소리에 의사가 목소리를 태운다.

기면증입니다.


무슨 증이란다. 뛸 듯이 기쁘다. 천세! 만세! 만만세! 잠에서 깬다. 깼는데도 꿈이다. 몇 번을 더 깨져야 꿈이 아닌 걸까. 깨져라 꿈아, 깨져라 꿈아. 하나 내가 기면증이라는 사실만은 깨지지 마라. 나는 도자기를 살포시 품에 안는다. 도자기에 세 글자가 어여삐 아롱져 있다. 기. 면. 증.




세월 지나 그 증상이 절로 없어진 지금, 가끔 꿈에서 그때로 돌아간다. 실제와 다른 건 둘뿐이다. 내가 병원을 찾아갔다는 것, 그리고 의사가 기면증이라고 말해 준 것.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늘 이런 식이다. 그때 누가 속시원히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내 무의식 속의 목마름이 있나 보다.


나는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이다. 타인의 감정상태를 제삐르게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따라가는 걸 잘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을 그와 같은 크기로 느끼는 게 늘 어렵다.


그렇기에 기면증으로 괴로워하는 이에게 '당신의 그 마음, 제가 알아요'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그 말이 나 따위가 입에 올리기엔 너무 엄청난 말임을 알고, 그때의 내가 기면증이 맞는지조차 불확실하고(이젠 확인할 길도 없고), 무엇보다도 누가 과거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고 내가 저 기분을 너무나 잘 안다는 생각이 퍼뜩 밀려오는 바로 그때야말로 스스로를 가장 의심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타인의 따가운 시선과 꾸중을 무수히 받아 보았던 입장에서,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부모님께 혼나고, 선생님께 혼나고, 상사에게 혼나면서 느껴 보니, 이건 타인의 시선에서 겉으로 보면 그냥 '잠이 많은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약하다!' '의욕이 없다!' '노력이 부족하다!' 질병이 태도로 둔갑하는 순간, 환자는 병 대신 스스로와 싸운다.


다니엘 키스의 <알제논에게 꽃을>이라는 소설에서, 지적 장애자인 고든은 수술로 지능이 높아진 뒤 동료들의 '농담'이 사실은 모두 조롱이었음을 그제야 안다. 기면증 환자가 진단을 받는 순간도 매우 닮았다. 수업 시간에 자다 불려 나와 전체가 보는 앞에서 잔인한 손찌검을 당했던 기억, 중요한 회의나 발표에서 손톱으로 손바닥을 파며 졸음을 참던 기억, 밥상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쥐고 자는 모습에 '넌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냐!'라던 어머니의 잔소리. 그 모든 장면들이 새로운 자막과 함께 재생된다. '아, 난 그때 아팠던 거구나.'


이 이야기를 한 발짝만 더 밀고 나가도 괜찮을까. 기면증뿐 아니라 우울증, 공황장애, 만성피로증후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현대 의학이 밝혀낸 수많은 '보이지 않는 질병'의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건 질병 자체보다 질병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의학의 역할 중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복원의 첫 번째 단어가 있다면, 그건 진단이다.


당연히, 진단이 병을 낫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바꿔놓는다. 서사를. '게으른 나'에서 '아픈 나'로. 자기 삶을 어떤 이야기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같은 하루가 형벌이 되기도 하고 투병이 되기도 한다. 형벌에는 수치심이 따르지만, 투병에는 존엄이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에는 심리학자 숀이 천재 청소부 윌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그 말을 흘려 넘기던 윌은 계속 같은 말을 듣자 눈물을 보인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 장면이 많은 이들의 기억을 맴도는 이유는 명확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자기 탓이 아닌 일을 자기 탓으로 삼은 경험이 있으니까. 간혹 누군가는 매일을 그러고 살기도 하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꿈속의 나는 한참 뒤 고개를 들고 울면서 물었다. '난 왜 이 모양일까'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로 바뀐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때로는 어떤 약보다 먼저 환자를 치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