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도 빗자루를 들던 사람도 쉼이 필요하다
예전엔 없었는데.. 대략 낙엽이 흩날리던 10월 중순경부터였던 것 같다.
아파트 쪽으로 들어가는 벽에 빗자루는 그렇게 거꾸로 서 있었다.
어떤 날은 중앙에 어떤 날은 오른편에. 위치는 바뀌었지만 빗자루는 쉬는 중이었다.
나뭇잎도 최근 내린 몇 번의 눈도 거침없이 쓸어재꼈을 빗자루.
다시 쓸어야 하는 그 시간이 도래할 때까지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빗자루 같아 보였다.
돌아보면 나는 여유롭게 마루 끝에 앉아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멍 때리는 시간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때는 사업실패로 온 가족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고
여중 여고 때는 공부 잘해야 현실을 탈피할 수 있다는 부모님의 무거운 기대감과
나 스스로의 압박에 큰 숨 쉬는 것도 사치 같았다.
대기업에 들어가 내 자리의 역할을 해내려고 애썼고
주위 남자사원들을 곁눈질하며
나의 성장을 틈틈이 채우려 노력했다.
현실의 포기와 도전이 혼재한 상태로 다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홀로 겁 없이 늦게 시작한 가난한 대만 유학에서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다 지쳐 어지러움에 쓰러지기도 했다.
나이 어린 다른 아이들이 타지의 한국풍 주점에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며 OB맥주를 기울일 때
나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구웠다.
잠시 짬나서 하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안 하면 살 수 없는
치열한 현장이었다.
매달 매달 사는 것이 스스로 기적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높은 담을 쌓고
마음속 빅뱅으로 우주를 탄생시키며 외롭게 견뎠다.
그래서일까.
나는 쉼이 고팠다.
내가 할 일을 다른 이가 온전히 맡게 하고
완전하게 쉬고 싶었다.
이후 긴 시간이 지난 지금의 생각
세월이 유수라더니.
인생 선배들의 말은 화가 날 정도로 틀린 게 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시기는 다르지만 짜인 인생의 궤도를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나온 시간 안에서 내게도 분명 나름 할애된 쉼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왜 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건 해결해야 할 일들이 꽈배기처럼 나와 엮여 있어서 인 것 같다.
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같이 쉬는 것이 이상적인 쉼일 거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 앞에서
한숨 푹 자고 나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듯한 의지가 생기는 육체의 쉼도 있고,
아무리 오래 쉬어도 벌어진 사건들로 뒤섞인 걱정 안에서
도무지 몸이 회복 안 되는, 쉼이라고 표현하기 싫은 쉼도 있다.
낙엽을 쓸고 쓸고 눈을 쓸고 난 뒤 잠시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빗자루.
아주 약간은 여유로 멍 때려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안쓰러워 보이는.
그러나 나름 자신의 일을 마친 모습.
그렇게 빗자루가 쉬는 동안 경비아저씨도 쉬겠지.
나는 요즘 어떻게 하면 즐겁게 쉴까를 생각한다.
아예 대놓고 쉬려는 계획이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쉬는 것 먼저 선택하는
게으름을 피우려 한다.
낙엽이든 눈이든 누가 쓸겠지 머.
그렇게 나의 중년이 여물어 간다.
내가 쉬어야 우주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