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스포일러 주의!)
몇 달 전 영화 <웡카>를 보고 스타트업과 관련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가 되었고 그것을 글로 기록해 두려고 한다. 영화 <웡카>는 단순히 초콜릿을 만드는 이야기를 넘어,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의 여러 면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게 해 주는 다층적인 작품이다. 영화 속 이야기와 나의 경험을 결합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 분업화된 노동, 그리고 예술과 소비에 대한 견해들을 서술해 본다.
꿈을 위한 상경
영화의 주인공 웡카는 시골에서 자란 뒤, 자신만의 초콜릿 레시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을 꿈꾸며 대도시로 이주한다. 이 과정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유사하다. 부산에서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경험한 문화적 충격(서울은 부산보다 인간관계의 패턴과 사람들의 가치관이 훨씬 자본주의적이었다)은 웡카의 여정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지방에서 나름대로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다가, 수도권 메가시티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느꼈던 감정들은 웡카의 초기 여정과 맞닿아 있다.
스타트업의 비전과 자본주의의 현실
웡카가 초콜릿을 대량 생산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그의 비전은 예술적 가치를 담은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이며 그는 스타트업의 창업가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기존 초콜릿 가게들은 쉽게 돈을 벌어다 주는 과점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비윤리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기존 초콜릿 가게들은 자본주의의 논리 그 자체에만 충실해 이익을 추구하지만, 스타트업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논리를 선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돈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보는 자와 수단으로 보는 자가 강렬하게 대비되고 있다.
초콜릿과 자본주의: 소비와 예술
초콜릿이라는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프로덕트를 대표한다. 영화 속 경찰관이 초콜릿에 지나치게 탐닉해 결국 절제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프로덕트가 제공하는 말초적 쾌락에 빠진 이들이 스스로를 상실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숏폼 콘텐츠가 제공하는 도파민 해킹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기존 초콜릿이 단순히 일상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도구라면, 웡카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아 초콜릿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한 소비재가 예술로 변모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초콜릿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의 예술과 소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으로 읽힌다.
초콜릿과 인터넷: 하수구의 은유
영화 속에서 웡카는 하수구를 이용해 초콜릿을 판매한다. 이 하수구는 인터넷의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인터넷이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공간으로 여겨졌듯이, 하수구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쓰레기'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하수구는 탈중앙화된 네트워크 구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검열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웡카는 이 하수구를 통해 가치를 전달하며, 기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복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어떻게 새로운 유통 채널로 자리 잡고, 탈중앙화된 구조로 기존의 권력을 넘어서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요정과의 협업: 경쟁에서 협력으로
영화 속에서 먼 나라에서 온 요정이 자신의 보물을 되찾으려다, 웡카의 초콜릿을 먹고 그의 비전에 감명받아 협력하게 되는 과정은 스타트업의 피벗과 협업을 상징한다. 초기에는 경쟁 관계였던 사람들이나 기업이 비전을 이해하고 협력하게 되는 과정은 실제 스타트업 세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마치 일론 머스크와 피터 틸이 경쟁에서 출발해 결국 페이팔로 협력하여 큰 성공을 이뤄낸 것처럼, 웡카의 이야기는 이러한 협력의 중요성과 비전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웡카와 그를 도왔던 하숙집 사람들이 하숙집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극적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들이 벗어난 이후에도 도시에서 하기 싫은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 나가며 여전히 체제의 부속품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적극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웡카가 시골에서 누리던 자유와 도시에서 겪는 분업화된 삶의 대조는, 현대 사회에서의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종교와 권력: 성당의 역할
영화 속 성당은 초콜릿 기업 및 경찰과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종교가 처음에는 대중을 구제하고 영혼을 보듬는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과 결탁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지배층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도 많이 목격되는 현상이며, 이 영화는 이를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사실 종교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며, 주장하는 바를 따랐을 때 구원을 약속하는 모든 체계는 타락하여 악용될 수 있다. 그 형태는 도덕 철학일 수도, 정치적 분파일 수도, 사회적 성공일 수도 있으며 그것들을 설파하는 '성당'의 구체적 형태는 각기 다를 것이다.
대량 생산과 사회적 문제
웡카가 요정의 도움을 받아 초콜릿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플래닝을 하는 모습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의 대조를 이룬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벌이자, 그들을 해고하고 저임금의 난쟁이들을 고용해 생산을 계속한다. 이는 선진국의 높은 임금 때문에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을 반영하며, 미국 러스트 벨트의 쇠퇴와 트럼프, J.D 밴스 등의 부상 같은 현상들의 배경을 보여준다. 웡카의 공장도 결국 대규모 분업화로 이어지며, 초기의 이상이 사회적 문제를 낳게 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들도 결국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러스트 벨트를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업들의 시작은 분명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복합적으로 담아낸 영화라 할 수 있다.
나가며
이상은 현실 속에서 변질되고, 자유는 체제 속에서 묶인다. 그러나 웡카의 여정이 남긴 흔적은, 우리가 여전히 꿈꾸고 질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이상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웡카의 이야기는 우리 삶 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