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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Feb 24. 2022

당신과 나의 거리

유나의 거리 (JTBC, 2014)

대학을 다니는 동안 살았던 자취방은 학교 뒤 산등성이에 있었습니다. 여름날은 그냥 견딜만했지만 겨울에는 웃풍이 세서 천장에 고드름이 생기곤 했었죠. 그리고 그 고드름 끝은 두더지 잡듯이 피워대던 담배 연기 탓에 까맣게 그을러 있었구요. 최근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 모두 억척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그런 분위기였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구요. 겨울철이 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연탄 트럭이 동네로 올라왔는데, 주민들 모두 그걸 양손에 들고 얼어있는 언덕길을 분주하게 왕복하기도 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창 밖에서, 밤에는 폭주족 아이들이 집 앞에서 부당 부당 거리고, 새벽에는 택시 기사분들이 만세를 부르기도 했구요.


당시 모두 다 그랬겠지만, 학생 때는 그야말로 고민의 연속이었죠.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과목부터 해서, 싹 다 뜯어고치고만 싶은 사회, 그리고 그 사회에 진입하려고 힘쓰는 선배들의 모습 등.. 뭐 사실 이런 고민들은 그냥 매일 술에 젖어 있고만 싶은 핑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수업보다는 영화 써클 활동에 매진했고, 학교 생활보단 아르바이트에 전념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엔 항상 술에 쩔어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김운경 작가의 <서울의 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제비족 박 선생(김용건)은 당장 먹고 살 벌이가 없는 터라 여기저기서 푼돈을 빌리거나 먹거리를 얻어가기도 하죠. 춘섭(최민식)은 당장 품팔이라도 하지 않고 빌어먹는 그가 아주 못마땅하지만, 홍식(한석규)은 그래도 춤선생이라고 깍듯이 대우합니다. 그날도 박 선생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셋방을 전전하다가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홍식을 발견합니다.


홍식 : 아.. 선생님… 저 마침 라면 먹으려고 하던 참인데.. 선생님도 한 젓가락 하실래요?
박 선생 : (못 이기는 척) 아… 그럼 그럴까?.. (허겁지겁 먹다가) 이야… 이 라면 정말 맛있다. 이거 새로 나온 라면이냐?
홍식 : 아.. 예.. '뚝배기 라면'이라고.. 이번에 새로 나온 거예요.
박 선생 : (얼굴에 미소 가득) 우와… 이담에 난 돈 많이 벌게 되면 꼭 '뚝배기 라면' 한 박스 사서 실컷 먹어야겠다.


그날도 숙취에 젖어 바닥에 누운 채로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던 중이었는데.. 느닷없는 라면 씬에 웃으면서 우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저 사람은 50대가 넘어서 먹고 싶은 라면을 실컷 먹는 게 소원이 되었을까 하고 말이죠. 팔팔 올림픽을 개최한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금융실명제 등등 개혁정책을 해가는데도, 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고 싶은 라면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할까 하고 말이죠.










유나의 거리, 2014, JTBC



제작 : 드라마 하우스

극본 : 김운경

연출 : 임태우

출연 : 김옥빈, 이희준






20여 년이 지난 후 한국 최고 재벌 방송에서 속편 격으로 방송하게 된 <유나의 거리>에서도 사정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더군요. 그동안 나라는 몇 차례 금융위기를 겪었으면서도 OECD 가입 대열을 놓치지 않았고, 일인당 국민소득은 3만 불이 넘은 지 오래고, 그토록 바라던 정권교체 후에 새로운 정당이 십 년간 나라 살림을 맡았었는데도 말이죠. 여전히 이 나라엔 집주인 눈치를 보면서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건설 노동자, 아니면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가득합니다.


물론 달라진 점도 있죠. 강산이 두 번 변했을 시간이니까요. <서울의 달>에서 춘섭이 색시감을 찾은 후 돌아갈 고향이 있었다면, <유나의 거리>에서는 아예 농촌이 몰락한 지 오래된 참입니다. 소규모 자영농은 거의 도시빈민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고 색시감은 동남아에서 이주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달> 후반부에 영숙(채시라)이 동생과 같이 했던 야채 트럭 역시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치킨집이나 편의점과 같은 대기업 계열의 프랜차이즈가 아닌 다음에 소규모 자영업이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된 거죠. <서울의 달> 초반부에, 건실한 회사원에게 시집을 가서 달동네 탈출을 꿈꾸던 영숙과 같은 여성도 보기 힘들어졌죠. 이렇게 모든 사회관계가 양극화된 상횡에서는 이제 더 이상 혼인을 매개로 해서 인생 역전이 되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습니다. 대신 <유나의 거리>에선 김미선(서유정)처럼 기혼남과 만나면서 스폰서를 받는다든지, 헤어지는 조건으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죠. 그리고 <서울의 달>에서 범죄로 그려지거나 비판적으로 그려졌던 유흥업소 종사는 이제 대표적인 국민 산업이 되어버렸습니다. 드라마 동선의 편의성을 위한 의도도 있겠지만 등장인물 대다수가 – 전직 경찰이든, 전직 깡패든 간에 말이죠 – 콜라텍, 노래방이나 카페에서 일하고 있죠. 실제로 2008년 여성가족부 및 다른 여성계 조사에 의하면 유흥업계 종사 노동자는 33만~80만 정도 된다더군요. 하지만, 유흥업계 종사 노동자를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소규모 자영업까지 합치면 더 놀랄만한 인구가 여기에 관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몇 해 전 한국에 가서 모처럼 친구들과 새벽 2시까지 마신 적이 있었는데요. 그 시간 평촌 시내에 대리운전기사님들로 가득한 걸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게다가 대리기사님들 상대로 커피를 파는 조그마한 노점들도 많았고요. 정말이지 한국의 밤문화가 얼마나 많은 서민들을 먹여 살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서울의 달>에서 <유나의 거리>로 전환하는 지난 20년 동안의 결정적인 변화는 소규모 자영업들이 절멸해 가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기업이나 부자들의 소비활동에 기생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것이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든, 노래방 주인이 되었든 말이죠. 유나(김옥빈)의 월세방 건물에 같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칠복(김영웅)의 경우 평생 칠장이로 살아도 좋으니까 일감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아서 그렇든, 대기업의 경영난조로 인해 건설경기가 침체되든 간에 부자들의 소비 위축이 서민들의 삶에 직격탄을 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감이 없어서 가계가 궁핍해진 상황이 되자, 칠복의 아내는 자신이 일하던 콜라텍에서 불법 비아그라를 팔다 경찰에 걸리게 됩니다. 판결은  벌금 120만 원. 하지만, 당장 낼 돈이 없어서 칠복은 아내에게 벌금 대신 교도소 노역을 은근히 권합니다. 결국 아내가 노역을 가기로 하고, 그 전날 밤, 칠복은 창만이(이희준)와 술잔을 기울이면서 울먹이며 말합니다.


칠복 : 난 말이야.. 우리나라 형법이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봐.
창만 : 유연.. 해져야 한다고 말입니까, 형님?
칠복 : 너.. 매품 판다는 얘기 들어 봤냐?
창만 : 그거.. 옛날에 부자들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이 관아에 가서 대신 곤장 맞는 거 아닙니까?
칠복 : 나는 만일에 대신 돈 받고 감방 가주는 제도가 생기면 우리나라 서민경제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창만 : 형님! 사람 사는 게… 경제가 전부가 아녜요. 만일 그런 식으로 법 체제가 운영되면 돈 많은 사람들은 감옥 갈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칠복 : 아니 부자들 감옥 좀 안 가면 어때? 난 누가 1억 딱 내놓으면서 1년만 대신 감옥 가 달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어.


아.. 뚝배기 라면 이후에 최고로 웃픈 장면이었습니다. 20년 전의 사회 양극화란 홍식이가 달동네 산자락에 서“Boys be ambitious!”를 외치면서, 제비족 노릇을 하면서까지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면, 이제 <유나의 거리>에서의 양극화 현상은 등장인물 그 누구도 자신이 부자가 되는 걸 꿈도 못 꾸게 합니다. 경기장 밖으로 아예 낙오되지 않도록 그냥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거죠. 부자들의 소비활동에 절대적으로 기생하면서 말이죠. 부자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부자들이 감옥에 간다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이 줄어들까 걱정하면서 말이죠.






한국의 선거철마다 항상 많은 정치평론가들에게 짭짤한 용돈을 주는 것은 "왜 가난한 사람들이 선거 때만 되면 부자 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연구일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일 거예요. 그리고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분석은 “진보를 자처하는 정권의 위선과 기만에 대한 징벌적인 표심”이라는 해석이겠죠.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계층 간 이동이 어렵고, 계층 간에 갈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선거라는 것은 그냥 "힘없는 서민이 힘센 정치가를 상대로 유일하게 갑질할 수 있는 순간"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대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시스템인데 단지 복수극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저 해석에서 '위선', '기만', '징벌'이라는 단어를 빼보면 어떨까요? 그냥 스트레이트 하게 진보 정당의 집권이 내 삶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는 식으로요. 물론, 어느 정도 배우고, 내 집도 있고,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도 가지고 있고, 권위주의 혁파가 한국정치에서 가장 당면과제일 거라고 생각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각 정당이 내세우고 있는 '보수' 혹은 '진보'라는 캐치 프레이드가 투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서민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자신들의 생계가 전적으로 부자들이 소비하면서 발생하는 떡고물에 걸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지하경제 규모에 실사가 들어가고, 불법 유흥 영업을 철저히 단속하고 유흥업소마다 세금조사가 들어간다면, 당장 도시 빈민 경제에 얼마나 많은 타격이 생길까요? 부동산 과잉공급을 막고 시장을 정상화해서 건설 경제 규모가 줄어들면, 당장 공사장에서 하루 벌어먹는 도시 서민들에게 어떤 영향이 갈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그 인격이 천하에 드러났고 사기꾼으로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건설경제 붐을 다시 일으킬 거고 부자들이 좀 더 돈 쓰기 편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명박을 찍게 된 것이겠죠. 이제 서민들의 표심은 빨갱이든 사기꾼이든 상관없이 부자들이 자신들에게 더 돈을 써줬으면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장일까요? 부자들만을 위한 사회 시스템을 싫어하면서도 하루하루 생존으로 위해 부자 정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꼴은, 마치 농장이 문을 닫게 되면 자신의 생존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주인을 보호하려는 노예의 모습과 같습니다. 서민경제.. 아니 사회경제 전체가 부자들의 지갑 여는 것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요?


예전에 저는 모든 사회운동의 전선이 기본소득 수준의 최저 생계비, 최저 임금, 근로시간 단축 확보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출세하려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좋은 대학이나 대기업에 가려고 노력한다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등의 현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쟁'이라는 필터가 인생에 있어서 '승리'와 '도태'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아니 최소한 승리와 도태의 차이가 지금처럼 몇천 배의 소득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전 세계 모든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공정한 시스템'에 대한 스트레스가 잦아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일본이나 미국처럼, 여관에서 이불을 접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비디오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더라도 걸출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이 나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문제는 많죠. 일단 이럴 경우 어떤 인센티브 시스템이 동기부여를 해서 경제구조를 유지하게 될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죠.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것이며 어떤 분야에 대한 재정이 부족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문제가 가장 큽니다. '공정성'을 최고의 화두로 삼고 있는 지금 전 세계 청년들의 속내는 '승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공정'이라는 형용사는 '경쟁'이라는 명사와 떨어져서는 거의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공정성'을 원한다는 것은 이미 '경쟁을 통한 필터링 시스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 상태라는 뜻이라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경쟁에 합의된 사회에 있어서 기본생계비용 지원이라는 정책은, 이 혜택을 입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동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런 사회적 합의의 차이에 있어서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도 점차 개선의 여지는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그 보다, 사회에는 다양한 입장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리고 유권자들로부터 선출된 사람들 간의 소통과 합의를 통해서 정책이 결정됩니다. 그것이 꼭 정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죠. 우리가 왕정 사회가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최선의 시스템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최악의 시스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나긴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 사회가 점차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에서, 정치판의 더러운 면을 부각하고, '선거'와 '심판'을 등치 시켜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정치'라는 단어를 벌레 보듯이 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로 정치를 더럽히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개개인의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회, 내가 춤을 출 수 있는 거리를 그려보는 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겠죠.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친구들이 더불어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당신 (You)과 나의 거리'에 대해서 먼저 꼼꼼하게 상상을 하고 난다면, 어떤 정당과 정치가가 주장하는 세상이 나의 거리에 가장 어울릴지를 판단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경쟁'을 통한 승패, 혹은 승리를 거둔 뛰어난 사람들이 이끄는 사회를 꿈꾸는지, 아니면 승패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거'가 단지 내 분노를 표출하는 '복수극'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상을 정치권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프러포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결과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보여주게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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