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림 국립공원 - 그린포인트 캠핑장 1
2021년 9월, 이레 밤의 캠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합의했다. 당분간 토피노는 그만 와도 될 것 같다고.
2019년 가을, 막판까지 좀처럼 가을 휴가 계획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중, 뭐… 거기 함 가볼까..? 하는 식으로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토피노 캠핑은 너무나 근사했다. 인상파 화가의 물감을 뿌린 듯한 저녁노을이 매일 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어느 날은 훈색 하늘을, 어느 날은 마노색 하늘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갯벌을 정신없이 취해 걸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마지막 빛이 사그라질 무렵이 되어 하늘이 진한 와인빛으로 가득해지면, 뭔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느끼기도 했었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이렇게 강렬한 경험을 해서인지, 다음 해 토피노에 또 오고자 하는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같이 공감하고 있었다. 2020년 2월에는 시내 에어비엔비와 리조트에서 묵고, 6월과 9월에는 다시 캠핑장을 예약했다. 팬데믹으로 국립공원 캠핑장 서비스가 갑작스럽게 중단되는 바람에 6월 캠핑은 취소되었지만, 9월에는 습하고 눅진눅진한 캠핑장의 공기를 마시고, 일주일 내내 안개에 덮혀진 바닷가를 걸으면서 호사스러운 저녁놀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첫눈에 빠져 불타올랐던 모든 종류의 사랑이 그렇듯, 돌아오는 페리 안에서 왠지 이것저것 따져보는 기분이 되었다. (페리 대기시간을 포함해서) 8시간의 여행, 말하자면 앞 뒤로 하루씩의 휴가날을 길바닥에 날리는 여행인데, 아무리 근사한 캠핑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여러 번 올 가치가 있을까? 페리 가격도 만만치 않고 말이지. 게다가 캠핑장이 토피노와 유클렐레, 두 마을 중간 지역에 있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20km는 가야 하는데, 식재료를 사러 시내에 가는 것만 해도 왕복 운전이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이러면 한번 시내에 나갈 때 최대한 뽕을 뽑고 와야 하나...? 하면서 셈을 하게 되자, 이래저래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또 매년초, 캐나다 국립공원 캠핑장 예약을 받는 시기가 되면 그때 가서 (예약비를 날리고) 취소를 하더라도 일단은 예약하자... 는 생각이 들게 된다. 9월부터 줄창 비가 오는 밴쿠버 겨울을 거쳐 가다 보면, 아웅... 빨리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북미 / 서부 사람들이 겨울에 보통 멕시코로 향하는 거겠지. 하지만 2021년... 아직도 뉴스에서 매일매일 확진자 수의 변화를 초조하게 지켜보던 시절. 여전히 해외여행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국내 캠핑장을 찾게 되었고, (스스로는 경쟁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고 자부하던) 나 역시 국립공원 캠핑장 예약 오픈날(방역정책 미정 때문에 2021년에는 4월에 오픈) 새벽부터 일어나서 웹사이트 새로고침을 하게 되었다. 운 좋게도 (중간에 메뚜기를 하지 않게끔) 한 사이트에 7일 고정으로 있을 수 있도록 예약이 되었고, 마치 습관처럼, 어린 시절 매년 여름에 찾았던 외갓집처럼, 2021년 토피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평균 203일 비가 오는 도시 토피노. 여전히 축축하고, 여전히 스산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라도 해질 무렵이 되면 수줍게 저녁놀을 드러내었다. 지난한 공사를 마치고 토피노 - 퍼시픽 림 국립공원 - 유클렐레 구역을 잇는 자전거 도로가 거의 모습을 드러내자, '이건 빼먹을 수 없지...' 하는 관광객의 심정으로 주욱 따라가 보았다. 그러다가 '명색이 롱비치인데... 바닷가로 달려도 결국에는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갯벌 위로 잔잔하게 들락날락하는 바닷물을 가르며 페달을 굴려보기도 했다. 물론 바퀴에 부서지는 포말이 신발과 바지를, 자전거를 적실 때는 물기뿐만 아니라, 흙과 소금기도 같이 튀겨내는 법이라서 이후 자전거 청소에 애를 먹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캠핑에서 돌아오는 길은 왠지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휴가가 끝나서 서운한 마음과는 달랐고, 마지막 휴가날 이틀을 운전과 캠핑 짐 정리로 써버린다는 게 좀 아깝기는 했지만, 그게 주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울적함은 좀 더 아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토피노를 안 오게 될 것만 같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뭔가 수틀린 게 있었는지... 그건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아내와 동시에 '이제 됐다. 충분하다' 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그렇게 토피노 여행은 적어도 몇 년 간은 없을 것만 같았다.
2022년이 시작되었건만 팬데믹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진 않았다. 적어도 1월까지는 해외여행이 여러 가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나라마다 출입국 격리 프로그램이 있었고, 캐나다와 한국은 여전히 단기방문 비자면제 프로그램이 복원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올해도 휴가는 국내 캠핑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토피노에 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초에 국립공원 캠핑장 예약 일정이 공개되었을 때 일단 예약 날짜를 달력에 마크해 두었지만, 어차피 안 가게 될 거 굳이 예약비를 날리면서까지 예약을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끝까지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예약 사이트 오픈날 즈음 개인적으로 정신을 챙길 겨를이 없는 일이 터졌고, 어쩌다 보니 예약 대기 사이트에 들어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관성적으로, 마치 이것저것 다 재고 움직이는 건 본능이 아니라는 듯이 또 그린포인트 캠핑장 예약을 하게 되었는데......
3대가 덕을 쌓아도 잡기 힘들다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사이트에 앉아서 저녁놀을 훔쳐볼 수 있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도 가깝고, 화장실까지도 가까운, 67번 사이트에 일주일 내내 예약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치,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도와준 것 마냥....... 아니... 이걸 어떻게 마다할 수 있냐고.... 이건 무조건 가야 하는 거네......
가끔 혼자 실실 웃으면서 복권에 당첨되는 망상에 잠길 때에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아... 당첨 사실을 어떻게 비밀로 하지?' 이런 헛된 계획을 잡는 일이긴 했었다 (캐나다에서는 고액 복권 당첨자의 정보공개가 의무입니다). 내 입으로 당첨사실을 떠벌이는 상황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복권 당첨에 비견할 수 있는 환상의 캠프 사이트에 예약을 성공하게 되자, 이건 왠지 우리만 독차지해서는 너무 아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마침 작년부터 급격하게 가깝게 지내게 된 아내의 지인 E 님과 D 님 부부 역시 캠핑 여행으로 휴가를 자주 즐기시는 터여서, 그분들께 은근하게 권해보았다. 토피노가 비가 많이 오는 동네여서 텐트 캠핑하면 좀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캠퍼들만을 위한 전용 해변은 꼭 한번 가볼 만하다, 매일 저녁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만만치 않은 페리 가격, 페리 대기 / 탑승 포함 편도 8시간의 여행시간, 그리고 우중 캠핑에 대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E 님, D 님 부부는 기꺼이 동반하겠다고 했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마치 거짓말처럼 휴가 일정 직전까지 비가 오고, 그 후 일주일 내내 맑을 거라는 일기예보가 확인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양 가정에서 환호성을 터뜨렸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냉장 식자재 짐을 싸고, 마지막 채비를 마치고 나서 집에서 출발할 때가 6시 15분. 밴쿠버는 아직도 비가 흩뿌리고 있었고, 그건 페리가 항구를 출발한 지 한참 지날 때까지 여전했다. 때문에 지난해처럼 햇살 가득한 페리 갑판에서 바다를 보며 컵라면을 먹는 플렉스는 누릴 수가 없었지만, 식당칸에서 빗줄기가 흐르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먹는 컵라면 (2개)도 나름 호사스러웠다. 생각보다 아침 준비가 오래 걸려서 항구에서 페리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캠핑장에 도착하니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어차피 퍼시픽 림 국립공원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 2시부터라서, 만일 더 일찍 왔다면 캠핑 트레일러를 뒤에 달고 시내라도 들어갔다가 와야 할 판국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더니 캠핑장 바닥이 아직 질척하다. 그래도 햇볕이 내리는 그린포인트 캠핑장이라니... 예전 경험을 돌아보면 뭔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캠핑 트레일러와 가제보를 설치하다 보니 벌써 3시 반이 훌쩍 넘어간다. 그래도 비가 안 온다니 타프나 차양을 설치 안 해도 되어서 예전보다 수월하게 끝난 편이다. 햇살은 들지만 기온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비가 안 오더라도 공기가 여전히 축축해서인지, 캠핑장에 가만 앉아 있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사이트에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광합성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얼른 저녁을 만들고 알코올을 몸에 집어넣어 최대한 뎁혀 본다. 이날 저녁 메뉴는 우리의 영원한 캠핑음식 '감바스'.
식사 후 해변으로 내려가 보니 어이쿠!!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이곳 롱비치 - 그린포인트 해안은 보통 모래사장보다는 고운 모래 갯벌에 가깝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래들도 바람에 죄다 날려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수증기처럼 캠핑장이 있는 절벽 쪽으로 날려가고 있는 모래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듄>의 한 장면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절벽에 있는 나무들이 죄다 눕혀져 있다. 오늘만 유난히 바람이 거센 게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냥 비가 안 와서 모래가 날리고 있는 것일 뿐.
해질 무렵이 되자 어느새 바람이 좀 잔잔해지고, 바닷물이 제법 차 올라 있었다. 대충 보니 6시 반쯤 간조가 된 후에 그때부터 천천히 다시 들어오는 듯했다. 하늘이 쾌청하게 맑은 날은 보통 노을이 재미없는 법인데, 이날 저녁은 지는 해 바로 위로 비행접시 모양의 구름이 계속 머물고 있었다. 마치 곧이어 해에게 떨어질 어둠을 가려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