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생애를 보냈다면, 어떤 일을 이뤘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여성이라면 대학교 졸업을 준비하거나 했을 것이고, 남성이라면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생활을 뒤늦게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30살이 되는 해에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 마흔은, 또 쉰은 어떠한가. 올해로 24살이 되는 나는 대학입학증도 전역장도 수입이 괜찮은 일자리조차도 없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책과 글만 써내리고 있다.
노동자와 기계
기존 푸코가 제시한 규율 사회는 노동자와 기계로 비유를 들자면, 사람을 노동자로 치자. 감독관의 관리하에 주어진 일만 끝낸다면 안식을 취할 수 있지만,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 사회에선 우린 마치 기계이다. 스스로 일을 끊임없이 해내야 하며, 업그레이드가 없으면 다른 성능 좋은 기계들에게 뒤처지기 십상이다. ("기존 규율 사회는 회사, 병영, 정신병자 수용소.... 였다면 현재 성과 사회에선 피트니스 센터, 쇼핑몰, 공항..... 이 들어섰다." -피로사회, 규율의 피안) 이러한 구조는 감독관이 필요 없다. 본인 스스로가 부족함을 느껴며 끊임없는 자기 착취를 이뤄가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 공장에 공장장이 있다면, 기존 규율 사회보다 성과 사회의 구조가 생산량이나 품질을 높이기 좋다고 보지 않겠는가. 거기에 감독의 역할에서 욕망만 살짝 부추기는 일만 한다면 전에 비해 시간과 수고를 덜 수 있을 거다. 비유에서 넘어와 현실에서는 공장장은 미디어나 금융권, 기득권이 될 수가 있으며, 혹은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 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영국의 경험론에 따르면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고와 이성을 기른다고 한다.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현상과 오이디푸스 구조를 설명하며 기존 이성의 지배 가운데서 무의식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퍼트렸다. 자크 라깡은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본인의 자아로 형성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자아와 무의식의 자아를 분열시키며, 무의식의 자아는 기존 자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존 자아를 지배하는 것보다 무의식의 자아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 현세대의 기득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경제를 보아도 이전처럼 단순히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수요가 절대적으로 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높은 가격의 명품을 사며 과시를 뽐내며, 상품의 이미지 즉 기호가치를 따지는 욕망의 소비활동이 주이다. 여기서 미디어는 소비자의 무의식, 즉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를 일삼고 있으며, 몇몇의 소비자는 본인 수익에 감당이 안 되는 소비를 행하고 있다. 힐링의 대명사격인 여행조차 금융권의 부추김일 것을 의심해봐야 한다. 최근 20, 30대의 해외여행 빈도 수가 급격히 늘어난 상태인데, 이들은 자본력이 매우 부족한 세대인데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현혹에 이끌려 너도 나도 해외라는 불행, 슬픔도 없는 '피안'으로 이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결국 과소비가 발생하고 본인 주변에 닥친 문제점을 회피하는 꼴이다. 그 '피안'에서는 타자의 욕망에 이끌려 본인에게 와닿지도 않은 유명 관광지를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귀국 후엔 또다시 불행의 현실로 빠지며 악순환이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국의 거대한 학력 자본 또한, 대학교의 이름이라는 '시뮬라시옹'에 매료되어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공교육과 사교육을 오가며 의자에 엉덩이를 쭉 붙이고 있다. 본인의 꿈도 없이, 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 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러한 욕망 또한 주체적이기보단 타자의 욕망을 자신에게 내재화시킨다. 따라서 끝없는 욕망의 늪에 빠지게 되고, 합격하지 못하면 무기력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수능 공부를 좋아서 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 따라서 하기도 싫은 공부를 어떤 이가 더 열심히 하냐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누가 비위가 더 제일 쌜까'의 싸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주체적인 소비
이러한 자기 착취 속에서 나타난 결과가 책에서 말한 낙오자와 우울증, ADHD이다. 이러한 문제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끊어내야 할까? 그럴 순 없다. 영국의 경험론에 의해서도, 우리 삶을 돌아봐도 타자의 욕망이란 끊어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길에서 어느 누구가 멋진 옷을 입고 있다면, 저 옷을 입은 본인을 상상할 것이고, 스마트폰에 인스타그램만 켜도 우린 부러움을 느낀다. 때문에 먼저 우린 올바른 소비의 주체성과 결단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굉장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게 요즘 세상이다. 젊은 나이에 월급 대부분을 차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품 가방이 아니면 가방 취급을 안 하는 사람 또한 있다. 점심에는 몇 십만 원이나 하는 고급 식당에 소비하는 반면 저녁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사람도 주변에 상당하다. 물론 이들은 과시욕을 뽐내면서 나름의 쾌락을 즐기긴 하겠지만, 이는 굉장히 일시적이며,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수익에 맞지 않는 소비를 지속하다 자멸할 것이다. 때문에 필요와 취향을 적절히 섞는 소비 습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거기에 더해 미디어나 주변의 과도한 부추김에도 분별력을 가지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이는 소비 주체성을 세워가는 것이며, 단기적인 소비가 아닌 장기적인 관점의 소비시선이 필요하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저축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투자냐 저축이냐
최근 오를 대로 오른 집값과 낮은 이윤에 의해 저축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재테크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100만 원 저축해서 4~5만 원 더 받을 바엔 주식 투자나 코인 투자로 폭발적인 이윤을 꿈꾸며 날마다 차트를 쳐다본다. 하지만 집값의 급격한 상승은 악재가 맞으나 이는 저축의 몰락과는 귀결되지 않는다. 모든 저축의 목적이 부동산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20대인 나에게 저축은 집을 구입하기보다는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나, 위기가 찾아왔을 때의 해결 수단으로 여긴다. 거기에 이 목돈으로 집을 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모순도 존재한다. 주식 투자 이윤율의 폭이 넓은 건 맞으나 거대 주주의 입맛대로 흐름이 매번 바뀐다는 점에서 안정성은 이미 개나 줘버렸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말하지만, 그 공부는 끝없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절대적인 이윤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국내 주식이야말로 해외 자본가와 주주들에 의해 개미들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름값만 아는 회사에 투자하여 나의 돈을 맡긴다는 점과 이윤을 내면 낼수록 끝없이 내고 싶어 하는 욕망의 늪에 빠지는 것은 사양하기 때문에 투자에는 관심이 없다.
끝으로
현대 사회는 욕망이나 행복을 자본으로 직결시켰으며, 벤담의 공리주의적인 논리를 기가 막히게 결합해 천민자본주의 사회로 만들었다. 사실 월급이라는 결과만을 기대하는 삶은 행복과 가깝다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관계성이야말로 한병철이 말한 '긍정적 피로'를 느끼는 삶을 결정짓지 않을까 주장한다. 인간은 관계성에 의해서 참된 행복과 슬픔을 느낀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가정이나 여러 공동체에 속해있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서로 상호주체적일 때 행복하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인식해 왔다. 자본의 물신성에서 벗어나 먼저 인간다움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길이 우선이다. 공동체와 목표를 이루어 나가며, 땀을 흘려가며 일하지만, 기분은 짜릿한, 이 긍정적인 피로를 느껴며 나아가다 보면 진정의 의미로 돈은 따라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