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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정 Jul 14. 2024

[영화 리뷰] <가여운 것들>, 불쾌함의 근원을 찾아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개봉 즈음 써두었던 글을 늦게서야 게시합니다.

** 펜을 든 계기가 그러하듯 줄거리 서술이 다소 소상합니다.


엠마 스톤 주연의 영화 <가여운 것들>(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에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화려한 수상이력이 보여주듯 평단에서는 호평이 이어지지만 대중의 반응은 영 혼란스럽다. 평단과 대중의 평가가 엇갈리는 일이야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반문할 수 있지만 대중의 반응 역시 분분한 점이 눈에 띈다.


필자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주변에서 들은 평 역시 주체적 여성 서사라던가 끔찍한 여성혐오 서사라는 식으로 양극을 달리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다른 해석을 불러왔을까?


필자가 관객석에서 맞닥뜨린 첫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그리고 불쾌함과 찝찝함 사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호감 역시 잔존했다. 아아, 이 영화 대체 어떻게 봐야할까? 복잡스러운 감정들의 근원을 파헤쳐보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천재적이지만 특이한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는 갓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고, 날이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넘쳐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자고 제안하자, 벨라는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나며 처음 보는 광경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서사의 면면을 하나씩 뜯어본다. 먼저, 벨라가 새롭게 되살아났다는 의미는 방금 막 강으로 투신한 여성의 시체를 갓윈이 건져올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여성이 뱃속에 품고 있던 아기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기의 뇌를 꺼내 여성의 머리에 이식한 후 그를 전기충격으로 살려낸다. 즉, 벨라를 ‘창조’해낸 것이다. 갓윈의 극 중 별명이 갓(god)임을 고려하면 그 창조적 의미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벨라는 갓윈의 제자 맥스가 한 눈에 반할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 ‘창조’ 과정에 의해 유아기적 행동을 반복한다. 어수룩한 언어에 부자연스러운 신체 움직임을 보이며, 폭력적이거나 비규범적인 행위에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벨라를 갓윈은 말그대로 ‘가두어 놓고’ 양육하지만 창조주(god)의 집은 그녀 세계의 전부이기에 그녀는 답답함 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 세계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 건, 세계 밖에서 들어온 맥스가 벨라와 교감을 주고받으면서 부터다. 갓윈은 결혼이라는 계약 제도를 통해 벨라를 더욱 강하게 묶어두려 한다. 그러나 미세한 균열은 거대한 균열을 불러오고야 만다. 계약의 조력자였던 변호사 덩컨이 갓윈의 자물쇠를 풀어내고 벨라의 성적 욕망을 일깨운 것이다. 그에 이끌린 벨라는 저 멀리 타국을 탐험하자는 덩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다.


세계를 탐험하는 내내 벨라는 상류층 여성들의 차림새와 눈에 띄게 다른 ‘짧은’ 치마를 입고서 다소 과할 정도로 덩컨과 성관계를 즐긴다. 벨라는 욕망을 여과없이 표출하며 스크린 역시 그를 노골적으로 비춘다. 그러나 그 욕망의 세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벨라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갈구했고 이 세계의 창조주 덩컨은 시샘을 이기지 못하고 유람선에 벨라를 묶어두려 한다.


그러나 벨라는 그곳에서도 또다시 균열을 낸다. 유람선의 할머니 승객이 벨라에게 책(철학)의 세계를 맛보여준 것이 시작이 된다. 벨라는 더이상 덩컨과의 관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다른 남성 승객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고, 그 남자는 벨라에게 그간 보이지 않던 유람선 밖의 지독하게 가난한 이들의 세계를 눈 앞에 보여준다. 벨라는 연민을 느낀다.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벨라는 덩컨이 도박으로 따낸 재산을 ‘아랫세계’에 내려보낸다. 대신 전달해주겠다는 남성 선원들에 의해 제대로 전달되지는 못했을테지만.

빈털터리가 된 벨라와 덩컨은 배에서 쫓겨나 낯선 땅에 당도하는데, 벨라는 또다른 세계에서 시작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창가에 직접 발을 들인다. 그러나 덩컨은 그녀가 사창가에서 벌어온 돈을 내던지고, ‘여성이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을 갔다며 벨라를 비난한다. 벨라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나를 아름답다 찬양할 땐 언제고 저 곳에 한 번 다녀오니 그렇게 꼴도 보기 싫어졌느냐”고.


벨라는 덩컨에게서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고, 다시 돌아간 사창가에서 욕망어린 삶을 즐긴다. 동시에 사회주의자 친구(‘투아네트’)와 어울리며 그녀의 세계를 단단히 만들어나간다. 이후에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지만 종국에 벨라는 그녀를 억압하려 했던 남성에게 복수를 끝내고서 맥스 그리고 투아네트와의 행복한 삶을 암시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리 써내려가다보니 불쾌함의 근원은 선명해진다. 노골적으로 신격화된 남성의 품에서 사랑받는 유아기적 여성.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매력적으로 여기어 사랑에 빠지는 남성들과 무례하게 그녀의 세계를 침범하는 거만한 기득권 남성. 결정적으로, 화면에 줄창 등장하는 그녀의 나체와 격정적인 성관계 묘사까지.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대상화하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는데 감독 역시 남성이라는 사실이 그 모든 것을 지양하기보다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영화와 같은 종합예술에서 그 차이는 늘 미묘하게 표현된다. 불쾌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담아낼수록 관객이 불쾌함을 함께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지만, 쟁점은 그와 같은 ‘불쾌’가 얼마나 충분하게 극복되는가에 있다. 이것이 대중의 평가가 엇갈린 갈림길이었을 것이다.


주체적인 여성 서사라 평가하는 이들에게 벨라는 끊임없이 주어진 세계를 부수어낸 여성이다. 날때부터 남성 창조주의 세계에 갇혀 수많은 현실적 한계들을 가졌음에도, 그녀는 매번 자신의 길을 또렷하게 선택해냈으며 늘 그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다. 결국에 모든 길을 직접 가보고서 그녀가 원하는 세계로 길을 터내고야 만 벨라는 한계없이 주체적이었던 여성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반면 끔찍한 여성혐오 서사라 평가하는 이들에게 벨라는 카메라 속 남성 인물들과 카메라 밖 남성 감독에 의해 반복적으로 소모되는 여성이다. 유아화된 여성을 아름답게 칭송하는 그릇된 시선의 현현이며 ‘주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성화된 욕망을 ‘보기 좋게’ 표출해내는 인물이다.


또한 모든 사건들이 남성 인물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서사적 한계를 짚어야 하고, 그녀를 모순된 존재로 제멋대로 탄생시킨 갓윈의 집에서, 그의 남성 제자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 역시 오롯이 주체적인 서사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될 수 있다.  


결말에서 복수의 칼날을 맞게되는 압제자를 생각하면 여성 서사의 카타르시스는 분명하게 있지만, 덩컨의 ‘손길에 의해’(명백한 폭력이 아니던가!) 성적 욕망을 ‘깨달은’ 벨라가 식사 테이블에서 자위를 하고 ‘순진한’ 남성 맥스가 그를 목격하는 따위의 장면은 아무래도 구역감을 참기 어렵다.


아카데미의 평단 역시 남성 중심적이기에 화려한 수상이력이 영화의 우수성을, 특히 영화의 젠더감수성을 담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탁월한 영상미와 화려하게 쏟아지는 비유와 상징,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은 두 말할 것 없이 압도적이지만 여성 영화로서의 가치 판단은 여전히 고민스럽다.


허나 사실 읽는 독자들께서는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래도, 이 영화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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