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아저씨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미국아저씨는 말 그대로 미국국적의 아저씨인데, 그는 전 직장상사였고 같은 회사를 다니다가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상사는 아니고, 이웃 주민이다. 같은 단지에 살기 때문이다.
강아지 산책길, 단지 내 편의점,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간단한 안부만 묻고 지내다가 얼마 전 복직 및 포지션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Educational Background에 대해 물어보길래 학부 때 미술(예)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말했다.그랬더니 본인은 많은 갤러리를 알고 있고, 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전공을 살려 갤러리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지만 별로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미국아저씨는 미국인답게 네트워킹을 위한 파티를 자주 여는데, 마침 다음 주에 본인의 집에서 파티를 한다고 하면서, 그곳에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종의 지인들이 올 예정이니 생각이 있으면 참석을 하라며 초대장을 보내주셨다.
이야기를 듣고는 친구 J가 생각났다. 그녀는 나의 대학 동기로서 같은 전공을했고, 또 해외와 국내 갤러리에서 일한 경력이 있지만 지금은 일을 쉰 지 꽤 되었다. 오히려 그녀가 다음 주 모임에 참석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미국아저씨에게 친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미국아저씨는 J가 이력서를 보내주면 취업을 보장할 순 없지만 갤러리 대표들에게 전달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허락을 받은 후 J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J의 말은 좀 당황스러웠다.
- 언니! 나 일 하기 싫어!
나름대로 신경을 써줬는데 거절을 해서 당황한 게 아니었다. 일 안 하고 놀고 싶다고 딱 잘라 말하는 단호한 목소리가 사고를 정지시켰다. 정말 미안한데... 너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사는 거야?라는 물음에 그녀는
- 언니, 모아둔 돈 천만 원만 있으면 1년은 놀 수 있어. 지금은 벌어둔 돈으로 놀고 있는데 돈 떨어지면 편의점 알바라도 하겠지 뭐.
고작 세 달을 쉬었는데도 나는 돈이 부족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두가 휴직을 권할 때도 수입이 끊기는 게 두려워서 버티고 버텼다. 휴직을 하더라도 유급휴직 기간 동안만 쉬고 빨리 복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도 또 발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몇 년째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 이 여행이 끝나면 뭘 할지 아무런 계획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의 속 그리고 경제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그 자체로도 존경스러웠다.
나에겐 항상 다음이 있었고, 그다음은 언제나 현재보다 더 나았어야 했다. 더 안정적인 직장이거나 급여 수준이 높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돈 10만 원이라도 더 쥐어줘야 움직였다. 그것도 아주 많은 고민 끝에 말이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젊음을 바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너무 편한 직장에 다녀서 도태되는 건 아닐까? 친구 누구는 벌써 팀장이고 누구 선배는 벌써 이사를 달았다던데 나만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 같은 불안 말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모든 걸 이연 시키는 사람들 중엔, 걱정이란 게 없는, 아니 적어도 나보다는 덜 초조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 평안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야! 그래 일하지 마!!! 나도 일하기 싫어... 너라도 놀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솔직해지자면, 예전의 나라면 J를 한심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좋은 기회도 차버린다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부럽다. 일을 안 해서, 매일 아침 만원 버스에 끼여 타지 않아서,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받지 않아서 부러운 게 아니다. 하기 싫은 건 안 해버리는 용기와 배짱을 갖고 싶다. 하고 싶은 걸 찾고 그걸 실행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게 더 쉬운데도 우리는 언제나 전자에 포커싱 한다. 답이 헷갈리면 소거법으로 아닌 것부터 찾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인데도 말이다. J라고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스스로 일을 안 하는 선. 택. 을 했다. 나처럼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 끌려가지 않고 말이다.
함께 발리행 비행기를 탄 그녀는 말했다.
- 언니가 힘든 시기에 마침 내가 일을 안 하고 있었고,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잠시 몇 달 쉴 뿐인데 대출이자와 관리비, 생활비 따위를 걱정하며 당근알바부터 알아본 나와는 참 대조적이다. 일을 안 해서, 회사를 안 다녀서 다행이라니. 대신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니. 평생 잊지 못할 J의 말. 어쭙잖게 일할 기회를 주려 했던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하기 싫은 일임에도 하지 못하면 불안한 건 나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