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 나이프로 다시 만난 필리핀
처음 발상은 순간이었고 단순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편지가 도착했고 개봉선이 없는 봉투라 무심결에 책상에 있던 레터 나이프를 사용했다. 수년 전 필리핀에서 사 온 wood letter knife였다. 한국 밖으로 나간 첫 해, 수공예품의 질감이 좋아서 용도도 모르고 구입했다. 책갈피 정도로 여겼는데 나중에 티브이에서 비슷한 모양의 도구로 편지 개봉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깨달았다. 그 나라만의 특색이 있을 것, 가벼울 것, 실용적일 것, 가급적이면 공산품은 피할 것, 정도가 그 무렵부터 생긴 나만의 기념품 구입 가이드라인이었다.
편지를 개봉하며 그 시절, 십 년도 지난 예전 필리핀 공예품점 실내가 떠올랐다. 몸을 씻으러 인적 드문 산길을 더듬어 도착한 냇가의 물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원숭이춤을 추며 우리를 반기던, 눈망울이 큰 피나투보 화산 근처 원주민 아이의 흥겨움이 전해져 왔다. 퍼득, 내 방 도처에 널려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물에 관해 쓰면 꽤나 흥미로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만난 당시 풍경과 마음 안팎 생각, 감정, 관련 인물까지 함께.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마침 '방에서 여행지 기분 내기'라는 컨셉으로 방 정리도 마친 참이었다.
민족 대이동의 명절 추석에, 내 방에서도 2박 3일에 걸친 물건 대이동이 있었다. 좁은 방에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있는지 지구촌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행적을 기억하기 위해 집어 든 소품들만 해도 정리 상자로 한가득 이었다. 아무리 실용적이라고 해도 한 번에 그 모든 걸 쓸 수 없어 박스행, 기념품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이런 걸 샀었나 싶은 것도 박스행, 떠돌아다닌 횟수만큼 늘어놓다 보니 끝이 없어 보이는 기타 등등의 것들도 박스행. 남들이 보면 잡동사니 같아 보이는 걸, 곤마리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지침 따라 손에 들고 마음 설렘 테스트를 실시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계절의 변화에 온기가 더 느껴지는 소품을 보이는 곳에 배치했다. 한 마디로 지금 내 방은 두근거림을 부르는 여행 기념품의 집합소인 셈이다.
그자비에는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책을 썼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가택 연금형에 처한 저자가 방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상상 여행을 한 기록이다. 비슷하게 나라는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모여 있고, 호불호의 취미에 따라 편집된 방 안의 사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관련 기억을 소환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남들은 시도하지 않았음직한 독특한 여행기일 테니 쓰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웨하스 의자]를 보면 주인공은 어렸을 때 스파이 놀이를 한다. 스파이의 시선으로 보면 평범한 물건이 진기한 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시선을 전환해 내 방을 하나의 거대한 사진첩으로 보려고 한다. 물리적인 모습의 사진첩은 아니지만 각각의 사물을 보고 만지고 느끼는 찰나, 역사와 과거와 여행과 추억이 펼쳐지는 장면을 독자에게 설명하며 내 방을 안내하는 여행 가이드가 되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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