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기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아마 그 모든 잣대를 관통하는 불변의 공통점은 판단의 주체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일 테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야 우리가 바로 인간이니까. 우리가 보기에 좋으면 선이요, 나쁘면 그것이 곧 악이 되겠지. 그런데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혹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까지 인간만의 잣대를 들이미는 게 과연 마땅한 일일까.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호랑이가 악한 것은 아님에도, 상당히 많은 창작물에서 육식동물은 악역으로 그려진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느냐는 전통적 논쟁에서조차, 그 대와 소의 무게를 비교하기 전에 그저 희생이라는 키워드에 매달려 입씨름을 벌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내가 슈퍼히어로물에서 히어로보다 빌런에게 더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장르의 특성상 초인적 히어로와 대적하는 그들 역시 육체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인간을 초월한 캐릭터들이 많다. 그들은 때때로 목적을 위해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법적인 수단까지도 어김없이 사용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류 -혹은 그를 상징하는 집단- 에게로의 피해와 그 결과로서 초래될 인류에게로의 피해가 그들을 악역으로 만든다. 작품을 보는 관객들 또한 영화 속 대중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의 위협인 빌런을 자연스레 악이라 바라보며, 인류를 수호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들은 선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기도 하기에, 본능적인 위기감 혹은 도덕적 굴레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 보다 합리적으로 빌런을 바라보는 것 또한 가능하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여러 부분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시리즈의 피날레 격 작품이라는 점 이외에도, 두 작품이 담고 있는 재회, 계승 그리고 작별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어우러져 더 큰 감정을 일궈냈다. 그들의 선택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도, 벅차오르는 감사함에 다시 또 눈물이 쏟아졌던 것도 같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가디언즈와의 작별에는 웃음까지 함께 했다는 거겠지. 얼굴은 눈물범벅이 다 되었는데 이상하게 입꼬리는 자꾸만 올라갔다. 정말로 헤어지기 싫었는데도 조심히 가라며 춤추고 손 흔들고 싶어졌다. 가족들이 재회하고, 모든 게 회복되고. 토니가 남긴 마지막 영상 속 메시지처럼, 이만한 해피엔딩은 분명 또 없겠지. 품을 떠나 각자의 길을 나아가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고 가족일 테니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에는 새로운 가족, 이제껏 떠나있던 가족들이 함께해 더욱 자라난 모습이 되어 있으리라.
이 뜨거운 마음을 다 표현한다면 어디까지고 글이 계속될 테며, 필시 나 혼자만 느낀 감정이 아닐 테니, 전반적인 감상은 여기까지만 하고 영화의 빌런 하이 에볼루셔너리(추쿠디 이우지)(이름이 길어서 이하 원작에서의 본명 ‘윈덤’으로 약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완벽한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시간 동안 각종 생체실험을 자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제로니안, 애니멘, 소버린 등의 종족을 창조했으나, 작중 그의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 훨씬 더 많은 종족을 멋대로 이용하고 멋대로 실망하여 행성째로 파괴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실험 단계에서부터 학대와 착취가 가득했다는 점이 로켓(브래들리 쿠퍼)의 회상으로 드러났고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절대적 악인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가 연상하는 선악의 기준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기에, 어쩌면 거대한 섭리나 위업을 앞에 두고도 근시안적 선택을 해버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사람마다 당연히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성장과 발전이 생명체의 의무라고 믿는다. 왜?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왠지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사고할 수 있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과 수족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우리는 모두가 한 명의 실험자이며 동시에 한 명의 전달자다. 선대에게 배운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때때로 개량하며, 한평생 연마한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어 그들이 더 좋은 답을 찾아내게끔 돕는다. 그렇게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더 나은 우리가, 마침내 더 나은 종으로 이루어진 더욱 진보된 사회가 완성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내 몸을 굴리고 태우고 채찍질하는 것을 어찌 악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당연하겠지만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폭거다. 우리는 저마다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로 한 사회적 합의 속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급진적 트랜스휴머니즘도 결과주의적 사고실험도 상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스크린 속 세상은 다르다. 우리는 이루지 못한 육체적·정신적 성장을 얼마든지 시켜보고 지켜볼 수 있다. 도덕이니 양심이니 가로막히지 않고 성장의 청사진을 접해볼 수 있다. 혹시 아는가. 그 과학적 성취를 목도하고 나면 현실에서의 가치관도 조금은 넓어질지.
윈덤은 완벽함을 갈망했다. 비록 그가 잔혹하고 가학적이며 지독히 독선적이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역시 타노스나 캉처럼 숭고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누구보다 자애롭다고까지 생각했으리라. 진화의 가능성을 놓친 채 그저 태어나고 죽기만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완벽으로의 계단이라는 기능을 부여해 주었으니까. 실험체들의 시체가 쌓일 때마다 수십 곱절의 데이터가 축적되었고, 그것들은 윈덤의 지식이 되어 다음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터널스>의 세르시는 숙주 행성을 파괴하는 셀레스티얼의 선택을 두고, 더 큰 선을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한들 비극만이 남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희생 뒤에는 말 그대로 더 큰 선이 남는 법이다. 단지 89 그룹의 우리로서는 그것을 선이라 납득하기 어려울 뿐이지.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던 라일라(린다 카델리니)의 말에 울컥했고, 혼자가 된 로켓이 또 다른 가족과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이후 두아트나 발할라, 선조들의 세계와 같은 일종의 사후세계에서 재회한 네 친구의 모습에는 다행이다 싶었을 정도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다. 저들의 사연을 알고 감정을 미루어 보았기에 애석함을 느끼면서도, 무엇이 더 큰 선으로 이어지는지 되새겨보면 금세 저울은 제자리로 기울어간다. 감정과 이성은 공존하더라도 별개로 존재해야 하기에.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업을 멈추어서는 결코 완벽한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윈덤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실험을 하던 것과 다름없다. 지적 생명체를 창조하고, 피조물을 심판하며, 무엇보다 ‘신’이라고 불렸다는 점에서 그는 MCU의 셀레스티얼과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 자신을 신이라 부르던 부하에게 신은 없다고 일갈했던 윈덤이 정작 노웨어를 보고는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죽은 신의 머리’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그가 신에 필적하는 우주적 존재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가 셀레스티얼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지. 신으로 여겨짐에도 노웨어의 사례처럼 불멸자는 아니라는 점, 방대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우주의 순환을 유지할 뿐 발전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 등에 실망하여, 그들을 더 이상 신이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완벽함을 이루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 무감각한 아리솀과 같이, 윈덤 또한 실험체들의 슬픔에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그 냉철함이 외부로부터의 감정 오염은 막아주더라도, 자신의 열등감이나 집착까지는 억누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연구자로서의 성숙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장은 부끄러움과 마주할지언정 훌륭한 아이디어는 수용해야 했으며, 설령 부족한 조언이라 해도 분노하고 무시하기보다는 유연하게 검토해야 했다. 만일 어린 로켓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면, 그를 고문으로 등용하거나 혹은 더 자주 대화를 나누어 지식을 끌어내거나, 하다못해 그 자리에서 바로 뇌를 들어내어 확실하게 확보했어야지. 자신의 말이 89P13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구태여 절망감을 주던 가학적 취미는, 자기 손으로 변수를 만든 최악의 선택이었다. 나는 윈덤을 악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심각한 오만에 빠진 우자였다는 사실에는 힘차게 동의한다.
셀레스티얼이 지적 생명체를 번성케 하는 것도, 그곳에 이터널스를 파견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이머전스 때문이다. 이머전스에는 요구되는 에너지의 총량이 있을 테고, 그것이 일어나야 하는 주기의 한도도 있을 것이다. 즉 기한 내에 이머전스의 조건이 충족될 수만 있다면, 아리솀에게 굳이 지적 생명체의 개체 수를 더 빠르게 늘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셀레스티얼은 완벽에 가까워지도록 생명체를 창조하고 이끌 수 있음에도 그러할 필요가 없기에, 오히려 그것이 자신들의 계획에 변수로서 작용하기에, 지적 생명체에 간섭을 최소화했고, 데비안츠를 적으로 설정했으며, 이터널스에게는 진화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윈덤은 목적의식이 넘쳐흘렀다. 신념이 너무 강해 메시아 콤플렉스로 표출되었을 정도로 그는 사명감에 젖어있었다. 그런 그가 셀레스티얼과 이머전스를 알았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저만한 힘과 지식이 자신에게 있더라면 그 어디보다 완벽한 이상을 세울 수 있을 텐데. 결국 힘도 지식도 저들에 미치지 못한 그에게 가능한 일이라곤 끝없는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적 학습뿐이었다. 다행히 셀레스티얼의 은총 덕에 우주는 생명으로 넘쳐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윈덤은 그들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원과 자료가 넘쳐난들 그것을 다루는 연구자가 자격 미달이었으니, 가장 이상향에 가까웠던 카운터 어스에서조차 실패의 흔적들이 피어난 거겠지.
앞으로의 MCU에서 셀레스티얼이나 이터니티를 비롯한 우주적 존재들이 지금보다 더 이야기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때마다 그들의 폭력 아닌 폭력으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그들까지 갈 것 없이 당장 멀티버스의 캉 의회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변종들조차 인커전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선택을 강행할 텐데, 우리는 <시크릿 워즈>로 이어질 그 혼란 속에서 과연 누구를 영웅이라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 결국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원작과 달리 그의 전사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자칫 그가 평면적인 악당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객관적인 관점에서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명백한 악인이지만, 그를 움직인 신념만큼은 선이나 악으로 딱 잘라 단정 짓기 쉽지 않다. 만일 이후 오로지 인류만을 위해 다른 모두를 희생시키려는 히어로나, 인커전을 피하기 위한 멀티버스로의 선제공격론이 대두된다면 우리는 그들도 그저 빌런으로 치부한 채 등을 돌릴 수 있을까. 우주적 대의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자가 이번에는 빌런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까지와 같이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줄 수 있을까. 프랜차이즈 초반의 지적을 지나 이제는 MCU의 강점 중 하나가 된 것이 바로 선악을 뛰어넘은 신념끼리의 대립인 만큼, 우리 인식의 한계를 깨부수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나아가 MCU 부활의 신호탄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