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Sep 02. 2023

웃음 가득한 영화에서 찾은 한 줄기의 감사함

영화 <잔고: 분노의 적자>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이제 우리네 일상이 다시 화창하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마스크를 벗고, 가림막이 사라지고. 10시가 지났는데도 매장의 불빛들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어 준다. ‘사회적 거리 두기’나 ‘5인 이상 집합 금지’ 등의 말들도 이제는 흐릿해진 안내문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니, 포스트 코로나와 엔데믹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나게 다가온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들여다보면, 지긋지긋한 그림자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는 지금도 팬데믹의 영향 속에서 싸우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침내 끝이 왔다며 기쁘다 손뼉을 치던 것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생활의 흐름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비록 인원과 시간이 제한되기는 했지만, 때가 되면 당연하게 식당을 찾았고, 식후에는 자연스레 카페로 향했다. 이따금씩 극장에 들러 새로운 영화와 만나기까지 했으니, 하루하루 충실히 평범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대체 그 고단했던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일상의 평범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필시 드러나지 않은 뒤편에서 우리를 지탱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정말 멈추어버리지 않도록 어제도 오늘도 자리를 지켜온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도 언제나 그래왔듯 내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터스텔라>를 패러디했던 <인천스텔라>에 이어, 백승기 감독이 준비한 할리우드로의 두 번째 도전장, <잔고: 분노의 적자>가 드디어 9월 13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에서 따온 제목부터, 20세기 감성의 포스터와 언어유희가 난무하는 예고편까지.


일견 영화가 그저 패러디를 앞세운 B급 코미디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러한 장르적 색깔을 영화가 진하게 두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품이 끝난 뒤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앞에서 지난 팬데믹을 되돌아보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결코 웃음만은 아니라고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는 패러디라는 특성을 살려 인물들의 등장에서부터 웃음을 자아냈다. 원작의 현상금 사냥꾼 장고와 닥터 슐츠를 대신해 가난에 쪼들리는 잔고(정광우)와 짠돌이 닥터 솔트(서현민)가 극을 이끌었고, 원작과 비슷한 듯 많이 다른 두 사람의 행적이 서부극답지 않은 애처롭고 친근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백승기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한 정광우 배우는, 장고의 표독스러움에 더해 아련함이 가득한 표정까지 보여주어 그가 지나온 삶의 뒷이야기를 더욱 궁금케 했다. 서현민 배우 역시 슐츠의 능글맞고 여유 넘치는 톤을 완벽하게 재현하였기에, 두 캐릭터의 몸짓이나 말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다.



원작과 어느 정도 대응되어 흘러가던 이야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재탄생한 빚갚으리오(손이용)와의 갈등을 시작으로 레이어를 더해 잔고의 꿈을 비추기 시작했다. 마이너를 넘어 마니악 하다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감독 자신의 모습을 잔고에게 투영했던 걸까. 잔고 역시 영화감독을 꿈꾸는 한 명의 청춘이었다.


그러나 블록버스터급의 그래픽도 화려한 출연진의 티켓 파워도 없이, 그 이전에 이렇다 할 지원과 투자조차 구할 곳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겠다 선언한들 ‘현실을 모른다는’ 차가운 반응만이 되돌아올 뿐이리라. 그의 꿈은 돈이 안 된다던 빚갚으리오의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에게 날아들었을지, 꿈을 가져봤던 우리라면 아프도록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를 찍고 싶다 말했다. 마치 팬데믹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던 지난날과 같은, 지독히도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기는커녕 웃음과 함께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먼 훗날 그가 할리우드를 제패할 수 있을지, 혹은 제2의 봉준호와 박찬욱이 되어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갈 수 있을지. 불안과 부담이 그를 눌러왔음에도, 끝내 잔고는 “컷!”을 외치며 작품을 완성해 냈다.


그렇게 끝이 나나 했던 영화는 카메라를 돌려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한데 모인 <잔고: 분노의 적자> 팀을 스크린에 담았다. 시기를 나타내듯 그들의 코와 입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지만, 자신들의 영화를 바라보는 그 눈빛만큼은 참으로 뭉클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 저 힘들었던 시기에도 누군가는 계속 꿈을 좇고 있었구나.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평소처럼 일상을 누릴 수가 있었구나. 영화의 진짜 마지막을 장식한 백승기 감독의 “컷!”에서야 비로소,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감사할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백승기 감독의 작품은 유난히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를 가득 채운 말장난과 막무가내식의 설정들이 누군가에게는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미디의 외피를 지나 그 속에 담긴 감사와 위로까지 이렇게나 잔뜩 받았는데, 어찌 그들을 따라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부터가 분명 커다란 도전일 테다. 그렇지만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팬데믹을 견뎌왔다면, 누군가를 의지하며 일상의 빛을 밝게 비추었다면. 이 영화를 만들고 채우고 전해준 모두로부터 수고했다는 위로를 받아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곁을 지켜주었던 이들에게 감사하다 전해 보는 건 또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29년을 전쟁에 묶여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