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여정을 마치고 캐리어도 꽉꽉 닫아채우고 나서 다섯시간 정도의 여유가 허락되었다.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맨하튼 중심가에 위치한 친구의 집에서 오며가며 화-려하게 나를 감싸는 볼거리들은 다 소화한 듯 싶다. 머릿속에 번뜩하고 떠오른 하나의 목적지는 다름아닌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다. 뉴욕에 도착한 당일에 비가 추적이던 늦오후에 들렀던 그 곳, 그렇게만 소비하기엔 표지만 보고 꽂아둔 책같아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복잡한 뉴욕을 휘적이기에 5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빠른 결단, 그보다 더 빠른 걸음을 재촉해서 브루클린, 그 중에서도 요악적인 경험이 가능한 윌리엄스버그로 향한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나가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잘 쓸 수 있겠다고 예감한다. 구름이 막 걷히기 시작한 거리에서는 시원하게 상반신을 노출한 러닝 크루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외석을 아낌없이 내어 놓은 카페 주변으로는 커피냄새(가끔은 베이컨과 빵냄새)가 진동하고, 대화에 열중하거나 읽기에 몰입한 사람들이 건강한 거리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꾸미고 있었다. 나도 잠시나마 이 장면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적합한 공간을 찾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말끔하게 드러난 파란빛 아래로 듬직하게 몸집을 갖춘 윌리엄스버그의 카페,devoción(데보시옹)을 찾았다. 앞서 걸으며 넘겨다 본 공간들에서 건강한 아우라를 뿜는 로컬의 모습에 꽂혀서 나도 그러기로 한 것. 널찍하게 조성된 카페는 대부분 조용히 커피를 픽업해서 속삭이고, 다양한 형태의 읽을 거리(랩탑, 패드, 리더기, 종이 간행물)를 뒤척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 서너시간 남짓 남은 시한부 여행자로서, 메모를 쓰고 글자를 읽기에는 조금 아쉬울 법도 한데, 그냥 이 장면에 포옥 묻혀서 오후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다. 찐-한 커피의 맛이 좋았음은 말해 무엇, 데보시옹에서의 한 시간은 이번 여행의 기억을 한 줄씩 쌓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다리까지 건너 강행한 이 여정에 잠시간의 여유를 부여한다.
뉴욕 최대의 푸드마켓 스모가스버그를 맞이하는 행운이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스모가스버그는 스웨덴어 스뫼르고스보르드(smörgåsbord,뷔페)와 윌리엄스버그 (Williamsburg)의 합성어이다. 매주 주말에 열리는 이 푸드마켓은 축제와 유사하다. 국적이나 재료가 한데 섞이어 100가지가 넘는 메뉴가 종횡으로 가득하다. 꽂히는 한 접시를 빠르게 고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택도 없었다. 빙글빙글거리며, 박물관을 돌듯 먹을 거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정처없을 줄 알았으나, 꽤 압축적 만족감을 획득한 브루클린에서의 오후다.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방식이 아니었던게 더 마음에 들었다. 발길 닿는대로 가보고, 앉고 싶으면 널부러지고, 먹을 것은 운에 맡기니, 자알 차려진 메뉴판이 내 앞에 뚝 떨어져버린다.
강변에서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면서 스모가스버그에서 고른 마지막 식사를 한다.
이제는 1시간이 남는다. 허드슨강이 아니라 한강을 건너는 일상으로 날아갈 시간이다. 맛있게 비운 포케가 하얗게 태운 마지막 5시간을 재충전 시켜준 느낌이다. 윌리엄스버그가 준 마지막 선물을 고스란히 안고 자리에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