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던 톱니바퀴가 강제로 멈춰 선 날
딸, 엄마, 그리고 수의사.
지금까지 살면서 어떠한 이유 없이 쉼이라는 허락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임신 초기 심장 소리를 확인하고 새벽 진통 속에 아기집을 유산하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출근해서 일을 했고,
임신 중에는 다행히 임신 체질인지,
원래 맹해서 닥치는 대로 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아니면 먹덧이 와서 그런지,
뱃속의 아이가 엄마 응원해 준 덕인지,
용케도 깡마른 몸에 배만 뽈똑 나와서 만삭까지도 출근해서 진료를 보고 기분이 좋다고 히히덕거렸다.
'아, 귀가 먹먹해... 잘 안 들리는데...' 귀에 물이 들어간 거처럼 먹먹한 증상에,
뒤돌아서면 '내가 뭐 하러 왔지? 자꾸 깜빡거려' 건망증에,
만삭 중 재채기하면 소변마저 그대로 주룩 흘러버리는 증상에, (요실금 정도가 아니고 그냥 배뇨를...)
원래 임신 중에는 건망증도 잘 생기고, 문어처럼 어딘가에 붙어 잠만 오고,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게 변한다는데 많은 걸 경험한 거 같았다.
이러는 임신 과정에서도 난 좋아라 했다.
딱 한 번의 쉼,
마음이 편하고 가장 행복했던 기간은 출산 후 아이와 12개월 동안 온전히 시간을 보낼 때였다.
그 기간은 면죄부를 받은 것 같았다.
그 후에는 다시 나의 삶은 톱니바퀴들처럼 맞물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톱니바퀴들은 이제는 멈출 수 없이 굴러갔다.
진료, 육아, 온라인 진료 상담 재택근무 등을 병행하며 여느 엄마들처럼 바쁘게 지냈다.
쉼 없이.
직장 근무 조건의 우선순위는 육아였다. 나의 근무 환경 조건도 아니었고, 돈도 아니었다.(물론 아예 아닌 건 아니지만.)
365일 바쁘게 돌아가는 동물병원에서는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육아를 위한 조건이 충족되면 가급적 나의 복지는 포기하려고 했다. 그게 도리라고 생각을 해서.
아이가 태어난 해가 코로나가 초기 유행할 때였고, 동선 발표라든지, 확진자 수를 매일 공개하던 때여서
아이가 코로나 확진이 되거나, 확진자가 확인되었다고 데려가라고 연락이 오면 난 직장을 뒤로하고 달려갔다. 사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이때는 코로나가 공포였다.
아이가 독감에 걸려 열이 나면 가정 보육을 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이 후순위로 밀렸다.
아이가 다쳐서 연락이 오면 또 나는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달려갔다.
아이가 수족구에 걸리면 가정 보육을 해야 하고, 나 역시 수족구에 걸려 손가락, 발가락 수포가 생긴 채로 아이와 뒹군다.
아이는 매해 주기마다 온갖 감염 질환에 다 걸린다.
나 역시 바이러스, 세균들을 아이와 침으로 교환하며 배양시키고 같이 아프다.
이런 엄마를 직장에서는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엄마가 아플 땐 쉬지 않고 직장에 나간다.
그리고 언제나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언제나 직장에서 잘릴 각오를 하고 있다.
열이 39도가 넘어도 해롱거리며 마스크를 꽁꽁 싸매고, 해열제를 쟁여두고 먹으며 일을 한다.
한때는 마시는 해열제를 몇 박스씩 집에 쟁여두고 음료수처럼 마셨다. '할머니네 집에 가면 몇 박스씩 쟁여두지 않나? 나만 이러는 거 아니잖아.' 하며.
몇 개월간은 호흡기 질환으로 격주로 내 목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목소리가 안 나올 때는 테크선생님들과 원무과 선생님들이 내 목소리를 대신해서 내가 글로 써 주면 문진과 간단한 상담 등을 대신 열일 해주셨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준 건 아낌없이 날 믿어주는 동료들 그리고 나 역시 아낌없이 믿고 사랑하는 동료들, 나의 손과 발, 입이 되어주고, 같이 웃어주고 울어주는 동료들.
그리고 날 믿어주시는 보호자들이었다.
25년도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 즈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동료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렇게 살다간 난 올해를 못 넘길 거 같아...'라는 말을 달고 지냈다.
한 번쯤은 쉼이 필요했는데
내 힘으로는 이 톱니바퀴들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무언가가 멈추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검진한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유방암 소견이 나왔으니 진단 검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쉼, 을 명 받았다.